▲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남북관계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명승일 기자] 올해 초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아 남북대화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대화 제의를 한 데 대해 북한은 대북전단 살포 중단 등을 요구하면서 현재 남북대화의 별다른 진척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쪽에 먼저 신뢰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뢰는 아주 작은 접촉에서부터 시작한다”며 벽돌을 쌓듯 단계를 밟아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대북지원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 “형편이 좋은 쪽에서 어려운 사람을 먼저 돕는 게 인륜 도덕의 기본”이라며 독일 통일일 이끈 동방정책은 접촉과 교류였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정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 현재 남북관계의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6.15남북공동선언의 배경과 평가는 어떠한가.

남북 간 큰 합의서가 4개가 있다. 큰 흐름에서 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남북공동선언이다. 6.15공동선언을 한 시기는 북한이 흡수통일의 공포를 지운 뒤다. 남쪽 대통령이 60년대 말부터 남북교류를 주장했던 사람이다. 60년대 말부터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의 철학을 가진 분이 대통령이 돼서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의 불안감을 없애고, 민간차원의 교류왕래를 활성화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북한을 흡수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킨 뒤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그런 의미에서 6.15공동선언은 국제정서의 격변 와중에 잘못하면 체제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 없이 남쪽에 대한 신뢰를 갖고 타결을 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남북 간에 얘기를 하자면서 북쪽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북쪽에서 먼저 신뢰를 보여주라고 말한다. 그런데 순서가 틀렸다. 신뢰는 서로 사귀면서 ‘약속도 잘 지키고 괜찮네, 알아서 척척 하는 것 보니까 믿음직스럽다’는 것이 신뢰다. 내가 널 신뢰할 수 있는지 신뢰를 보여 달라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맹점이다. 신뢰는 아주 작은 접촉에서부터 시작한다. 접촉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축적되면서 관계를 더욱 심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10.4공동선언은 6.15정상선언과 같은 맥락이다. 10.4공동선언은 남북 간 상호불신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북한이 불안한 상황에서 남쪽으로부터 상호체제 존중을 인정받기 위해 나온 것이다. 6.15공동선언은 남쪽 정부가 북쪽에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믿을 만하기에 이제는 진정성을 갖고 남북 간에 잘해보자고 해서 나온 것이다.

- 북한을 지원하는 게 (북한) 체제 유지를 돕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퍼주기’라는 용어는 옹졸한 얘기다. 대북지원이 북한체제를 살려준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독일통일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독일은 사민당이 집권한 69년부터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0년 동안 진보정권 13년, 보수정권 7년을 거쳤다. 진보정권의 대동독지원정책, 이른바 독일식 퍼주기 정책을 보수정권인 기민당이 계승하겠다고 선언하고 시작했다. 20년 동안 서독에서 동독으로 간 돈이 1044억 도이치마르크다. 약 580억불 정도다. 그렇게 해서 동독이 서독을 군사적으로 공격했는가.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도의 전략이다.

형편이 좋은 쪽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인륜 도덕의 기본이다. 20년 동안 서독이 동독에 (돈을) 주면서 동독 경제가 일어나게 했고 동독 민심이 서독으로 오게 만든 것이 동방정책이다. 대북지원이 북한 정권의 붕괴를 막았다고? 북한 체제가 붕괴되면 그 난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때 그 민심이 남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북한 정권이 붕괴되면 대한민국 정부는 혼란이 온다.

- 그럼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실천이나 진정성을 얘기하는데, 우리는 왜 안 하는가. 형편이 좋은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진정성을 얘기하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은 악마의 제국이다’며 ‘그런데 그들이 악마의 제국이기 때문에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얘기다.

지금 북핵문제를 갖고 북한의 선(先)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회담 결과로 나와야 할 것을 미리 보자고 하는 회담이 어디 있는가. 신뢰프로세스도 마찬가지다. 신뢰는 ‘컨피던스 빌딩(Confidence Building)’이라고 하는데, 벽돌 쌓듯이 하나씩 쌓아 올려야 한다. 신뢰를 먼저 입증해야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신뢰프로세스가 아니다. 참으로 답답하다.

- 북한은 남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일정책이 바뀌어서 남한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통일정책의 기둥이 근본적으로 없는 것인가.
기준이 없는 게 아니다. 정책의 연속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북한은 장기집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책의 연속성이 보장된다. 미국도 공화당과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대외정책의 차이가 있었다. 불변의 국가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지에 대한 것은 정권마다 다르다. 전략적 목표는 같고 전술적 조치가 차이가 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일과 많은 차이가 있다.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시작한 동방정책을 그 후임자들이 계속 이어갔다. 사민당이 13년 집권하는 동안 동방정책은 유지됐다. 82년 기민당으로 정권교체가 되고 헬무트 콜 총재가 대동독정책에 관한 한 이전의 정책을 계속한다고 했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민족은 통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우리가 정책의 연속성을 가지면 괜찮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연속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 반대로 뒤집어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됐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를 뒤집고 신뢰프로세스를 얘기했다. 그런데 슬그머니 핵문제 진전이 없는 상황에선 안 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신뢰를 쌓아가면서 핵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후 진정성이 따라붙으며 신뢰할 수 있는지 먼저 입증하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깐 10년 햇볕정책, 10년 반(反)햇볕정책을 왔다 갔다 한 것은 우리 사회 내부의 이념적 편향이 강한 탓이다. (남북)통일을 하려면 서독처럼 전 정부 정책을 무조건 뒤집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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