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광복의 결실을 이루기까지 우리 역사는 수많은 수난과 굴곡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가열찬 독립의지는 더욱 빛을 발했다. 일제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창설된 한국 YWCA는 시대의 암운(暗雲)속에 피어난 희망의 불씨였다. 1922년 3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발기회가 개최된 이후 6월에 정식으로 창설된 한국 YWCA는 시대, 종교, 여성, 민족의 4개 키워드를 고스란히 반영한 단체였다.

한국 YWCA 창설은 동경여자학원에서 수학하며 동경 YWCA를 경험했던 김필례(金弼禮)와 중국 북경 협화원에서 학생 YWCA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각경(李珏璟), 이화학당에서 수학했던 김활란(金活蘭)과 선교사 아펜셀라 여사와 겐소 부인의 후원이 있었기에 일본에 예속되지 않은 조직체로 발기될 수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주축을 이루었지만, 그 시대의 틀을 타파하려는 여성의 계몽의지와 조국애가 조직에 투영돼 있었고, 자유와 평화, 정의실현을 지향했다.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인 계몽운동에 참여했고, 지식인으로 거듭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한국 YWCA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연령, 국경을 초월하는 여성지식인을 양산한 한국여성정신의 한 요체로서, 교사, 간호사, 의사 등 신여성의 출현을 독려하며 그들의 의지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통로를 자처했다. 그래서 한국 YWCA는 시대의 경계를 넘어선 한국여성의 공식적인 행보로 주목된 것이다. 한국YWCA는 창설 2년 후인 1924년 8월 25일 세계 YWCA에 정식으로 가입해 그 존재를 알렸다.

일제강점으로 민족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그 시대의 틀을 넘어서는 행보를 했던 한국여성이 두드러졌다. 지역, 연령, 분야를 막론하고 활동했던 이들의 숙원은 오직 민족독립이었다. 그것은 한국 최초 여의사이자 독립활동을 했던 박 에스더(1877~1910)도 비록 총과 칼은 아니었지만 한손에 청진기를 들고 피고름에 신음했던 환자들을 위해 무료 순회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고,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다.

박 에스더는 아버지 김홍택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 넷째 딸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선교사의 집에서 일했던 영향으로 선교사와 인연이 됐던 그녀는 이화학당에 입학, 반대를 무릅쓰고 정동 예배당을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1890년 즈음 한국의료사업을 개설했던 닥터 홀의 통역을 맡으며 접했던 의학에 대한 관심은 미국유학으로 이어진다. 뉴욕 퍼블릭 스쿨 1년, 6개월간 간호학교 수학에 이어 발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의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박 에스더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 1887 스크랜튼 설립)’에 한국여성 최초의 여의사로 부임했다.

비록 핍박받던 그늘진 시대였지만 한국 YWCA와 한국여성의 진취적인 행보는 희망의 불씨를 자처하며 민족독립에 힘을 보태었다. 그 속에서 민족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일으켰던 한 여성, 최초 여의사 박 에스더의 삶에서 민족의 의미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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