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시위대가 지난해 11월 29일(현지시각)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인근에서 2011년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혐의로 기소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세속주의 국가’ 튀니지, 안정된 민주화 과정 밟아가
이집트, 이슬람 정권 들어섰다 도로 군부정권 회귀


[천지일보=정현경 기자] 지난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23년간 지속됐던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북아프리카 및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가 된 튀니지의 민주화 시위는 이집트를 비롯해 알제리, 예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 독재정권에 시달리던 인근 아랍국가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랍의 봄’으로 불리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민주화 물결은 4년이 지난 지금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튀니지만이 지난해 12월 역사적인 첫 자유선거로 새 대통령을 선출했을 뿐, 이집트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유혈충돌로 번지면서 25일 하루 동안 20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특히 지난 24일 평화시위를 벌이던 여성 인권운동가 엘 사바그가 군부가 쏜 총에 맞고 숨져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올해 4주년… 퇴색된 ‘아랍의 봄’

지난 2011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아랍국을 휩쓴 민주화 물결은 대단했다. 이들 나라는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으며 수십년간 독재정권이 이어져 경제위기와 부정부패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던 곳이다. 그해 1월 튀니지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하자 서방 언론은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이름을 따 ‘재스민혁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재스민혁명은 이집트로 번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철권통치에 반발한 이집트 국민들은 반정부시위에 나섰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그해 2월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후 ‘아랍의 봄’ 광풍은 아랍권을 휩쓸어, 10월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함에 따라 42년간 계속된 독재정치가 막을 내렸고, 11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권력이양안에 서명하면서 33년간 계속돼 온 철권통치가 끝났다.

이들 이슬람권 국가들에 분 민주화 열풍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아랍의 봄’ 4주년이 되는 올해, 튀니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는 계속되는 정치 혼란에 최근 시위대와 군부의 유혈충돌로 ‘아랍의 봄’이 물거품이 됐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튀니지, 첫 민선 대통령 선출

‘아랍의 봄’을 촉발시켰던 튀니지는 성공적으로 민주화를 정착시키고 있어 ‘유일한 승자’로 불린다.

튀니지는 재스민혁명 후인 2011년 10월 역사적인 첫 자유선거를 실시했다. 217석의 의원을 뽑는 이 선거에는 100개 이상의 정당이 참여했으며, 국제감시단을 포함한 5000명의 감시 하에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가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등록유권자의 55%만이 투표에 참여하겠다고 밝히자 선거를 앞두고 획기적인 캠페인이 진행됐다. 도심 건물 외벽에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사진이 크게 걸린 것. 지나가던 사람들은 갑자기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벤 알리의 대형 사진을 보고 몰려들었고, 화가 난 시민들은 욕설을 하며 사진을 뜯어냈다. 그러자 “독재자는 다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투표하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나타났고, 이 캠페인은 큰 호응을 얻어 투표율이 88%까지 올랐다.

비록 410만명의 등록유권자 외에 310만명에 이르는 미등록 유권자들이 있었고, 국민들이 투표에 익숙지 않아 포기한 경우도 많았으나 혁명 이후 민주화 과정이 잘 이뤄진 케이스로 꼽힌다. 그 후 1~5차 과도정부를 거쳐 지난해 10월 총선과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러 베지 카이드 에셉시 대통령이 12월 31일 취임했다. 에셉시 대통령은 첫 자유경선으로 치러진 민선 대통령이라 그 의미가 깊다.

튀니지가 다른 아랍국인 이집트나 이라크, 레바논, 예멘, 시리아, 리비아와는 달리 오랜 세속화의 경험과 발전된 시민사회, 비교적 분절화가 덜한 사회를 지니고 있기에 혁명 후 민주화 정착 과정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튀니지는 아랍 국가 중 가장 세속적인 국가로, 벤 알리 전 대통령 시절에는 라마단 단식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첫 선거에서도 이슬람 정당인 엔나흐다당(부흥운동)이 다수 표를 얻었으나,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나 레바논의 헤즈볼라, 사우디나 이란의 이슬람주의자들과는 선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신임 에셉시 대통령은 세속주의 정당인 니다투니스당(튀니지당) 출신으로, 지난 24일 발표된 하비브 에시드 신임 총리의 새 내각 구성안에는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의 엔나흐다당 소속 인사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알자지라와 AFP통신 등은 에시드 총리가 장관 22명을 포함해 39명으로 짜인 새 정부 구성안을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장관 지명자는 세속주의 정당인 니다투니스당이거나 독립 성향의 인사, 군소정당 소속이다. 여성도 9명 포함됐다.

엔나흐다당은 첫 총선에서 승리한 후 실정에 따른 반감이 커지고 경제적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니다투니스당에 잇따라 패했다. 새 정부 출범식은 다음 주에 열릴 예정이다.

▲ 베지 에셉시 튀니지 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1일 의회에서 코란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4년 전 아랍의 봄을 시작했던 튀니지는 혼란 속에서도 민주화 전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정치적 혼란 거듭되는 이집트

튀니지가 안정적으로 민주화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데 반해 이집트는 계속해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어 국제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1930년대부터 이슬람의 정치적 이념과 체제를 고수하기 위한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이 전개됐고, 그 중심에는 ‘무슬림형제단’이 있었다. 2012년 6월 혁명 후 처음으로 이뤄진 자유 민주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지원하는 모하메드 무르시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집권 1년 만인 2013년 6월 독재정치 및 경제파탄 등의 이유로 다시 봉기된 이집트 반정부시위와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르시 대통령이 축출되고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지난해 6월 군부 수장인 압델 파타 엘시시가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이집트는 3년 넘게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유혈충돌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이집트 시민혁명 4주년을 맞은 지난 25일에는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시위대와 군경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최소 20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명이 다쳤다고 알자지라와 이집트 언론이 보도했다. 평화시위에 참가한 샤이마 엘사바그가 총에 맞아 숨지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공개돼 공권력에 대한 비난도 커지고 있다.

2011년 민주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혐의로 기소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무죄 선고를 받고, 무바라크의 두 아들 알라와 가말도 혁명 4주년을 앞두고 최근 교도소에서 풀려나자 이집트가 과거 체제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졌다. ‘아랍의 봄’이 물거품이 됐다는 탄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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