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1950년 10월 26일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 1사단이 원산항에 상륙, 장진호로의 진격을 시작한다. 미 해병 1사단은 태평양 전쟁에도 참여했던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강의 군대다. 별명이 충성으로 섬기는 주인의 적을 물어뜯기 위해 가죽끈에서 풀리려 몸부림치는 사나운 사냥개 ‘도베르만(Doberman)’이다.

그들의 원산항 도착은 중공군이 서부 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한 바로 다음날 이루어졌다. 전황이 심상치 않아선지 이들의 상급 부대이자 동부전선을 책임진 10군단장 네드 알몬드(Ned Almond) 중장은 스미스 사령관에게 장진호를 향해 서둘러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스미스 사령관은 유럽과 태평양 전장을 수없이 누빈 용사일 뿐 아니라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다. 그 같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그의 예감은 아주 좋질 않았다. 그는 그의 진격이 중공군이 쳐놓은 덫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직감했다. 따라서 알몬드의 진격 명령은 불같았지만 그는 무슨 핑계든지를 동원해서 가급적 신중한 행보로 대처했다.

그렇게 해서 장진호를 향해 진격을 개시, 11월 2일까지 그들이 이루어낸 것은 수동과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까지의 진출이었다. 수동 북방에서는 중공군과 첫 전투를 벌여 그들을 물리쳐 북쪽으로 사라지게 했다. 황초령은 다리 하나가 걸려 겨우 통행이 이루어지는 좁고 험한 고개로 다리 밑은 천 길 낭떠러지다. 그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고 나면 비로소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내려가기도 하는 개마고원이 평평하게 열린다. 장진호의 물은 황초령까지 24킬로미터의 지하 터널로 역류된다. 거기서 4개의 거대한 파이프가 황초령 밖으로 뻗치어 그 물을 급사면 절벽 아래로 폭류(爆流)시킴으로써 발전 수차를 돌리게 된다.

만약 중공군이 미 해병을 그들의 덫으로 유인할 생각이 아니고 격퇴하려 했다면 스미스 사단이 황초령을 건너기 전에 다리를 파괴했어야 옳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미스 사단이 다리를 건넌 뒤에서야 다리를 부쉈다. 이로써 중공군의 의도와 유인 전술은 명백해졌고 스미스 사령관의 처음 직감은 적중했다. 수동 북방 전투에서 중공군이 쉬이 퇴각한 것도 미군을 그들의 덫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용 전술이었을 수 있다. 다리는 만약의 경우 후퇴로일 수도 있지만 외길 보급로로서 생명줄이다. 때문에 미군과 중공군 사이에 황초령 다리를 놓고 부수고 새로 짓고 하는 실랑이가 계속 벌어져야만 했다.

스미스 소장은 알몬드의 명령대로라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부대의 지나친 엷은 산개(散開)와 분산을 피하려 애쓰면서 진격을 벌여 11월 16일 고드름처럼 길게 뻗친 장진호의 남쪽 끝인 하갈우리에 도달해 사단본부를 꾸린다. 스미스는 그곳에 서둘러 비행 활주로를 건설한다. 효과적이고 원활하게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해서다. 드디어 11월 25일 스미스 사단의 5연대와 7연대가 1사단의 선두 창끝(spearhead)부대로서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진출한다. 이들 부대는 맥아더나 알몬드의 계획대로 작전이 성공한다면 장진호 진격 작전의 백미(白眉)가 되고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될 이틀 후인 11월 27일의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진호 서쪽 산악길로 40~50마일을 진격해 청천강 상류 고산 지대의 무평리에 진출함으로써 서부전선 조지워커(Johnnie Walker) 장군 휘하의 8군단 병력과 합류해 동서부전선을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악에 숨어든 중공군을 포위하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것이 장진호 진격에 나선 스미스 해병 사단에 부여된 임무였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인 소망사항에 불과했다. 산악에 포위되어 차단당하고 갇히는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도리어 유엔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쉽게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미군은 탱크 장갑차 대포 각종 차량으로 중무장한 기갑군대로서 이들 장비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길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험준한 산악 소로(小路)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은 더디고 느리고 무겁다. 무엇보다 항상 길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동하는 동안 시종 적의 목표물로서 훤히 드러난다. 이에 비해 중공군은 산 속에 몸을 숨기고 미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며 공격할 때는 가볍고 날쌔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수적으로 압도적이고 경쾌한 중공군을 그들의 무장이 형편이 없다 해서 미군이 산악에서 그들을 쉽게 제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중공군은 이를 충분히 간파하고 철저히 미군의 약점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마침내 스미스 사단은 27일 무평리를 향해 진격에 나선다. 중공군이 전(全) 전선에서 최후 공세에 나선 지 이틀 뒤다. 장진호 본 전투의 시작이다. 중공군 6개 사단, 대략 6만 병력이 스미스 사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섬멸할 태세였다. 도쿄 사령부에서마저 해병 1사단은 잃어버린 사단으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11월 30일 서부전선이 무너지자 전 전선의 미군에 전면 철수령이 내렸다. 이에 따라 스미스 사단은 우선 유담리 2개 연대가 하갈우리 사단본부로 철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후 그곳에 일단 집결한 스미스 부대가 진격할 때와는 정반대의 과정을 밟아 함흥과 흥남 중간의 안전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가 그 유명한 장진호 철수작전이다. 그러니까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 동안의 전투다.

이 전투를 통해 미 해병 1사단은 그들을 섬멸하러 덤비는 중공군에 세계 최강의 근성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해병 1개 사단이 중공군 6개 사단, 종국에는 7개 사단과 3개 사단의 일부가 가세한 대병력과 혈투를 벌인 것이다. 중공군은 미군에 4만여명이 죽고 2만이 부상함으로써 9병단이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스미스 사단은 561명 전사, 실종 182명, 부상 2894명, 동상자 36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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