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페셜] 500년전, 양반·서민 차별 없이 오밀조밀 살던 ‘그곳’
[문화스페셜] 500년전, 양반·서민 차별 없이 오밀조밀 살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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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하면 확대. ⓒ천지일보(뉴스천지)
종로구 공평동 발굴성과… 한울문화재연구원 발표
16세기 주택변화상 확인, 건물지 37개 골목 3곳도
골목 유적 보존방안 마련… 주변에 조선 주요시설 多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500년 전 16세기 도심 골목의 모습은 어땠을까. 사극 드라마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일까. 서울 종로구 공평동 61번지(우정국로 28-1). 근현대의 흔적을 걷어내니 4m 아래로 16세기 도시가 펼쳐졌다. 드러난 주거지와 길터는 토사 무너짐 방지를 위해 쌓아올린 축대 등을 통해 조선시대 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김홍식)이 시행하고 있는 ‘서울 종로 공평 1·2·4지구 도시환경정비 사업부지’ 발굴조사의 성과 발표가 지난 15일 현장에서 이뤄졌다.

발굴조사 결과, 해당 부지에서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골목을 중심으로 한 당시 주택들의 변화상이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서 건물지는 37개로 확인됐다.

골목은 모두 세 곳이 발견됐다. 골목 좌우에는 건물 여러 채가 있던 흔적이 있다. 조사단은 양반가와 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골목을 따라 오밀조밀하게 함께 어울려 살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골목 즉 도로의 양측으로 건물의 축대나 담장을 조성했으며, 특히 세 개의 도로 중 1개는 폭 5m 내외로 넓은 편에 속했다. 다른 두 개의 도로는 폭 2.6~3m 내외였다. 이들 도로 유구는 현재까지 큰 변화 없이 500여년 가까이 이어져 와 당시 도심 속의 유기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이날 발굴 현장에서 조사단 관계자는 “드러난 건물 형태, 규모와 발견된 도자기, 그릇 조각 등의 유물을 통해 16세기 즉 500년 전 도심골목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사지역에서는 건물터 내부와 주변 등에서 16세기 유물로 판단되는 백자발, 백자잔, 백자접시 등의 도자기편들과 기와편들이 출토됐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동경(銅鏡, 구리를 재료로 만든 거울)과 제기(祭器, 제사 때 사용한 그릇)도 발견됐다. 건물터에서 발견된 백자 그릇과 기와 조각들도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조선 전기의 골목과 건물 구조가 어떻게 500년 가까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쓰러지거나 불탄 건물터 위에 새 건물을 얹었던 방식이 지금까지 이뤄져 왔다.

조사단 관계자는 “3.5~4m의 층별로 조사한 결과, 시대를 거치며 건물이 무너져 내린 터 위에 그대로 토지를 다져 여러 차례 건물을 쌓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신희권 교수는 “원래의 지형과 지세를 이용해서 필지가 구획돼있는데 그런 필지가 사실은 거의 변함없이 5백 년 이상을 현대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칸칸이 비교적 질서 있게 자리한 터의 규모와 석재로 미뤄 보아 이 일대에는 가옥뿐만 아니라 상가 등 다양한 용도이 건물이 늘어섰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특히 공평동 37·38번지의 건물지4-33으로 명명된 곳은 유구의 잔존상태가 양호한 건물로, 온돌방과 탄화된 마루 흔적까지 온전히 남아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중심채에 양측으로 1×1칸 규모의 날개채를 덧붙여 ㄷ자형 평면을 조성하고 있다. 이 건물의 평면 양상을 보면 서측 1칸에는 온돌방을 두고 그 남측으로 연결된 날개채에는 부엌을 조성했다. 그리고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마루를 뒀는데, 동측으로 덧붙은 날개채까지 탄화된 마루의 흔적이 명확히 확인된다.

‘공평동’이라는 지명은 재판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데 연유한다. 특히 조사 지역이 위치하는 종로구 공평동은 북쪽으로는 견지동, 동쪽으로는 인사동, 남쪽으로는 서린동·관철동, 서쪽으로는 청진동과 접해 있는데,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견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한쪽으로는 지금의 사법기관인 의금부가, 또 한쪽으로는 가게가 모인 시전이 있었다.

이 지역은 1894년(고종 31년)에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공평동이 됐으며, 1943년 4월 구제 실시로 종로구 공평정이 됐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동으로 바뀌면서 공평동으로 변경됐다.

이번 조사지역 주변으로는 보신각, 의금부터, 수진궁터, 순화궁터, 사동궁터 등 조선시대 중요한 시설이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울문화재연구원은 각 문화층마다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문화재청에 보고해 전문가 검토회의 또는 학술자문회의를 개최하고, 향후 조사방향 및 유구 보존방향 등의 의견을 수렴한 후 하강조사를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는 측량, 사진촬영, 실측 등을 실시해 기록하고, 유물은 층위, 유구별로 수습해 유물의 성격, 특징, 시기 등을 파악할 예정이다.

보존과 관련해 문화재청은 건축주와의 협의를 통해 새 건물이 들어선 후에도 발굴된 골목길 유적을 보존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조사단 관계자는 “보존 처리 후 건물 개발 후에 관련 패널로 일반인에게 소개하는 방안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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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2015-03-25 15:29:25
양반과 서민이 함께 어우려져서 함께 살앗다는 것은 참 좋은 일 아닐 수 없습니다

나란히 2015-01-20 21:44:16
조상님네들 생활상을 알게되는 귀한 자료입니다.

김태현 2015-01-19 18:43:24
터 발견~ 역사 발견~ 양반 서민 그런것들이 아직도 우리들 몸에는 흐르는것 같다 바로 돈 있는 것들의 갑질이 바로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