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방분옥 평양통일예술단 대표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선구자의 사명”
[인터뷰] 방분옥 평양통일예술단 대표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선구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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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분옥 평양통일예술단 대표 ⓒ천지일보(뉴스천지)

남과 북의 문화를 춤과 노래로 잇고, 탈북자에 직업의 기회 제공


[천지일보=강은주 기자] 탈북자들로 구성된 예술단체인 평양통일예술단 방분옥(59, 여) 대표를 만나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 생사의 경계선을 넘어온 탈북 이야기를 들었다.

방 대표는 평양통일예술단 이름에 대해 “평양은 ‘북한’을 의미하고 통일은 ‘남과 북의 문화’를 하나로 만들자는 의미가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평양통일예술단은 북한에서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던 10명의 여성으로 구성됐다.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 경계선을 넘었다. 예술단은 문화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북한체제에서 신음하는 탈북자에게 희망을 주는 통일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어 방 대표는 어깨가 무겁다.

그는 “한국에는 2만 6000여명의 북한 탈북민이 입국한 내용이 통계로 나왔다”며 “언젠가 는 통일이 되겠지만, 남한과 북한이 사상이념이 다르다. 그래서 탈북한 사람이 남한에서 잘 정착해서 살고 있으면 통일의 선구자가 역할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방 대표는 양강도 예술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노동당에서 운영하는 광산연합 예술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99년 고난의 행군 때 남편을 잃고 탈북했다.

다음은 방 대표와의 일문일답.

Q. 탈북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북한에서 2003년 10월 탈북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통해 2004년 1월 대한민국 도착했다. 탈북한 지 10년 됐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라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이 도강(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건너 살았다. 그때 산이나 들에 나가 풀뿌리 나무뿌리 다 캐 먹어도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노동자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아이들을 살려야 하겠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가 생겼다. 그때 탈북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통해 2004년 1월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됐다.

Q. 남과 북의 문화를 잇는 평양통일예술단인데.
남과 북은 언어와 문화 경제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그 격차를 줄이는 것은 예술문화에 답이 있다. 예술단을 통해 남과 북을 노래와 춤으로 잇고 탈북자들에게 직업의 기회라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내 심정이다. 우리 예술단이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선구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만의 전용극장을 가지고 공연을 펼치는 목표가 있다. 또 극장 무대에서 남한과 북한의 공연자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바람이다.

Q. 평양통일예술단의 설립 배경과 작품소개를 한다면.
평양통일예술단은 탈북여성 10명으로 구성됐다. 국내에서 북한의 춤과 노래로 남한과 북한을 잇는 문화예술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우리를 받아주고 일자리를 준 곳이 남한이다. 배려에 감사하다.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사랑 나눔 봉사활동과 탈북민에게 직업의 기회를 통해 꿈을 펼쳐주고자 창단하게 됐다.

예술단은 2007년 설립해 교회공연을 시작으로 현재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해 경기도 안성시의 시립공연단과 뜻을 같이해 안성 맞춤랜드서 매주 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한 달 평균 20회 공연을 하는데 3회 이상은 무료 공연을 한다. 특히 소외계층인 장애인 복지시설과 양로원, 교도소를 다니며 무료 봉사공연을 펼치고 있다. 설립 이후 전국을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1500회가 넘는 공연 기록을 돌파했다. 단원들은 무대에서 ‘쟁강 춤’ ‘물동이 춤’ ‘휘파람과 강원도아리랑’ ‘반갑습니다’ 등 북한의 대중가요와 민속춤뿐 아니라 남한의 트로트 등 화려하고 경쾌한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 평양통일예술단의 물동이춤 공연 (사진제공: 평양통일예술단)

Q. 예술단을 이끌어 오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
남과 북의 이질감이 심해서 동일성으로 만든다는 게 너무 어렵다. 또 창단 당시에는 예술단을 몰라 초청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공연을 가면 가끔은 사람들이 다른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남과 북이 한 동포 한 형제인데 주변의 시선이 안타깝다.

예술단은 공연을 20~30분을 해도 정성을 다한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우리를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대우하는가?’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교통비 1만원에도 공연에 나설 만큼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단원 중에는 만원이라도 더 주는 일자리가 있으면 예술단을 떠나는 일도 생겼다(눈시울을 붉힘).

우리 예술단은 개인에게 후원받는 것은 없다. 단원들에게 급여 제날짜에 주고 세월호 때문에 우리가 모두 가슴 아프고 그 유가족들이 얼마나 곤란을 겪었는가. 1년 동안 공연 제대로 못 해도 단원들 급여는 챙겨주고 그랬다. 그래도 제가 대한민국 사람한테 감동한 것이 있다. 남한 사람은 자기 주머니 불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울 때 국민을 위해서 도와준 모습에 깊은 감동을 했다. 안성시에서 우리에게 공연을 함께하도록 배려해 주고 사무실과 연습장을 도와주고 있다. 받은 것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안성시에는 요양원이 많다. 대한민국이 국민들이 아름다운 모습은 본받아서 우리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Q.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선구자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2010년 방 대표의 딸인 조은희 단장이 입단하면서 조 단장을 중심으로 한 최승희 무용의 대표작인 ‘쟁강춤’과 ‘물동이 춤’ 등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최고 예술기관으로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9년 동안 월북 무용가인 최승희 선생에게 무용을 전수받은 수제자 조은희 단장은 북한에서 직접 무용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승희 5대 창작작품과 대한민국의 현대무용 등 ‘쾌지나칭칭나네’ ‘신고산타령’ 새 작품을 만들고 있다. 조 단장 무용은 한국 고전무용과 달리 박자가 빠르고 관객이 손뼉 치며 호응하는 작품들이 많다.

북한의 기존 의상을 입기보다 의상도 직접 디자인해서 관객이 선호하는 의상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활동을 하면서 노력을 많이 부으면 생각한 대로 되더라. 사람은 생각하면 꿈이 실현되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만의 전용극장에서 춤과 노래로 관객과 의사소통하는 예술인으로 자립하며 꿈을 펼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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