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정부 통계에 따르면 터키 국민의 99%가 이슬람교인이며 시리아 기독교인 인구는 2만명 수준으로 매우 미미하다. 그러나 터키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성지 중 하나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찾아든 초기 기독교인의 사연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3일에는 터키 정부가 (1923년) 건국 이후 첫 교회 승인에 나서 화제가 됐다. 터키의 기독교 성지 중 성경 66권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 언급돼 각광받고 있는 터키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그리스령 밧모섬에 관해 정리했다.

▲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소아시아 7교회 위치. ⓒ천지일보(뉴스천지)
◆요한 소아시아 7교회에 정말 편지했나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요한계시록(啓示錄)은 기독교 신약성경의 예언서이자 마지막 문헌이다.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이 AD 95년경 밧모섬에 유배됐을 때 예수가 환상으로 보여준 계시의 내용을 기록했다.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지시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장차 될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계시록에서 밝히고 있다.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이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예언서라는 점에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요한계시록 사건의 시작인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 보낸 일은 실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실제 터키에 일곱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우상숭배 등이 당시 일곱 교회에 성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계시록 강연으로 주목받는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은 다른 입장을 보인다. 신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표현과 같이 당시 사도 요한이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실제 보낸 것이 아니라 계시록이 성취 될 때 사도 요한 격인 사명자가 출현해 편지하게 될 것을 미리 예수가 사도 요한에게 이상으로 보여주고 기록하게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신천지는 그 증거로 실제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가 편지를 받은 증거가 없다는 점과 사도 요한도 후년에 에베소 교회 담임이었다는 점, 사도 요한이 본 7별 곧 일곱 교회 사자를 비밀이라고 기록한 점을 든다. 예언서이기에 터키 일곱 교회의 특성을 빗대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실제 터키 일곱 교회에 편지를 했는지 여부를 떠나 터키 일곱 교회는 계시록에 언급되고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지였다는 이유로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기독교인의 성지순례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밧모섬. 이곳은 과거 로마제국 당시 종교 정치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계시록 기록한 유배지 밧모섬

밧모(Patmos)섬은 ‘에게(Aege)해의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그리스에 속해 있지만 터키 본토 해안에서 불과 60㎞ 떨어졌고 아테네에서는 250㎞나 떨어져 있다. 면적은 우리나라 영종도의 크기와 거의 같은 34㎢이다. 남북길이 16㎞, 동서길이 9㎞이며 중간 부분은 너비가 1㎞에 불과하다.

해안 굴곡이 심해 주위 둘레는 약 60㎞에 이르나 면적은 4㎢ 정도다. 주민은 2700여명이며, 절반 이상이 섬 중앙의 언덕에 있는 호라(Chora)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피서철이면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해 전 세계인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당시 이 밧모섬은 종교, 정치 중범자를 귀양 보내던 유배지였으며,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생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도 로마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AD81-96년 재위) 박해 때 이곳에서 약 18개월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계시록을 기록했다.

현재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장소에는 동굴교회가 세워져 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는 이미 90세가 넘어 눈이 어두웠다. 이 동굴교회에는 요한을 대신해 함께 있던 브로고로 집사가 계시의 내용을 대필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명으로 전해진다.

▲ 밧모섬 요한계시록 동굴에 있는 그림. 90세가 넘어 눈이 어두워진 사도 요한을 대신해 브로고로 집사가 계시록을 대필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사도 요한은 어떤 인물이었나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세배대의 둘째 아들이며, 예수의 제자인 야고보와 형제이다. 원래 어부였다. 배에서 그물을 깁다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부친을 두고 예수를 따랐다(마태복음 4장 21~22절). 10대 후반에 예수를 만나 평생 예수와 함께한 사람이다.

불같은 성품 때문에 예수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 칭함 받았다(마가복음 3장 17절). 체포된 예수를 따라 담대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던 유일한 제자(요한복음 18장 15~17절)다. 여자들과 함께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섰던 유일한 제자이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목도한 제자였다(요한복음 20장 30절).

또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로 불리고, 다락방에서 예수의 품에 누웠던 유일한 제자이자 순교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유일한 제자이기도 하다.

◆에베소, 소아시아 최대 항구도시

에베소교회는 사도 요한이 후년에 담임으로 일했던 곳이다. 에베소(Ephesus)의 현재 도시 이름은 셀주크(Selcuk)다. 과거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모든 교역로로 가장 부유했던 항구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아시아의 시장이며 문명의 빛’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3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했으며 또 감옥에 갇혀서도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기록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기를 당부했다.

에베소의 고고학적 발굴은 1863년 영국박물관의 지원 하에 우드(J.T. Wood)에 의해 시작됐다. 수차에 걸친 발굴 결과 구시가의 전모가 분명하게 되었다.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등 당시의 유적이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서머나, 에게해의 진주로 불린 곳

서머나(Smyrna)교회가 있던 서머나의 현재 도시 이름은 이즈미르(Izmir)다. 이즈미르는 터키의 3대 도시 중 하나이자 두 번째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또 호머의 고향이기도 한 이즈미르는 “에게해의 진주, 아시아의 사랑,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과거에는 로마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최초로 황제신전을 세울 정도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유달리 높았던 도시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해변을 따라 잘 정돈된 도로와 푸른 공원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장 잘 살린 도시로 올리브 나무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원시해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버가모, 우상숭배 극에 달했던 도시

버가모(Pergamun)의 현재 이름은 베르가마(Bergama)로 에게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약 24㎞, 서머나 북쪽 약 30㎞ 지점에 위치한 도시다.

버가모의 뜻은 “이중결혼” 또는 “결혼산” 이라고 한다. 버가모는 BC 1~3세기까지 그리스 앗탈루스 왕조의 수도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농업을 비롯해, 은광업, 가죽업, 양털 직조업, 양피지업, 등이 발달한 산업도시이기도 하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데메테르 신전, 트라이안 신전, 헤라 신전, 제우스-아스클레피온 신전, 텔레스포로스 신전 등 수많은 신전이 있었다.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만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기독교 측면에서 이곳은 우상숭배의 총본산과도 같았다.

버가모교회는 현지 사람들에게 크즐 아블루라 불리는데 이는 영어로 뜻은 ‘붉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붉은 벽돌로 주후 2세기경에 지어진 건물로, 본래는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숭배했던 세라피스(지옥의 신)을 숭배했던 신전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다른 신전들이 높은 곳에 지어진 데 반해 낮은 곳에 위치한 하천 위에 지어졌다. 실제 지하에 가면 하천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은 AD 300년경에 기독교인의 교회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비잔틴 제국이 쇠망한 13세기 이후에는 폐허로 변했다.

◆두아디라, 자주장사 루디아 고향

두아디라교회가 있었던 도시 두아디라(Thyatira)는 이즈미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80㎞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명은 악히사르(Akhisar)다. 예전 이곳은 염색 모직 공업이 발달해 인조삼이 많았고 행상들이 많았던 도시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오는 자주(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도 이곳이 고향이었다.

또한 제조술이 발달되어 주석(Fine Brass)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다. 두아디라는 잘 발달된 상업조합을 가지고 있었다. 두아디라교회의 유적지는 숱한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기둥만이 남아있다. 현재 두아디라교회가 있는 악히사르에는 아폴론신전이 남아 있는데 그 당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신은 아폴론(Apollo)이었다.

◆사데, 고대 페르시아 제국 도시

사데(Sardis)는 BC 3세기경에 사데(Sardis) 왕가에 의해 세워진 도시다. 현재 이름은 사르트(Sart)로 불린다. 사데는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수도인 Susa에서 사데에 이르는 약 3000㎞의 도로를 대리석으로 포장해 ‘황제의 길’을 만들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의 도시로 번영했던 곳이다.

사데는 두아디라의 남동쪽으로 약 65㎞ 정도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이즈미르(Izmir)에서 아피온(Afyon)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BC 8세기 세계 최초로 화폐를 주조해서 사용하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전통적으로 헬라의 ‘카벨라’ 여신을 숭배했는데 로마의 ‘다이아나’로 알려진 사냥과 생명의 여신을 말한다. 그 후 BC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으며, 이 당시에 세운 신전은 그리스 시대의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일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그러나 B.C 100년에 로마의 속령이 된 후에 잦은 지진과 터키족 및 몽고족 등의 침입으로 페허가 됐다. 사데의 유적으로는 유대인 회당, 체육관 등이 남아 있다.

◆빌라델비아, 원형사라진 거대도시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헬라어로 ‘형제사랑’이란 뜻이다. 현재 알라셰히르(Alasehir)로 불리는 고대도시 빌라델비아에는 성벽과 아크로폴리스 극장, 신전 등의 흔적이 있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과 도시개발로 고대도시의 원형은 찾기 어렵다.

마을 한가운데 AD 6세기에 건축된 빌라델비아 ‘요한 교회’가 황폐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약 15m 높이의 육중한 돌기둥이 당시 교회의 규모가 거대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BC 1세기경 ‘밀의교(密儀敎)'의 규정이 기록된 대리석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빌라델비아에 이교(異敎)가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빌라델비아 고대도시는 따로 보존되지 않았다. 고대도시 위에 신도시가 형성돼 유적지 바로 옆이 주택가이며, 교회 터 앞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다.

◆라오디게아, 양모 풍부하고 안약 유명

라오디게아(Laodicea)의 현재 이름은 라오디키아(Laodikya)다. 라오디게아는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이며,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셀레우시드 왕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라오디세(Laodice)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 불렀다고 한다.

300m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인 이 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목욕탕 등의 유적이 있으나 고고학적 발굴은 신통치 않다. 라오디게아교회 터는 유적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교회라 추정되는 이유는 교회에서 사용되었을 만한 십자가 문양이 있는 돌들이 늘려있기 때문이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 때 완전히 파괴됐으며, 이곳에서 운동장과 원형극장 터가 발견되었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다. 특히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이 좋지 않아 멀리 히에라볼리 파묵칼레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