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이재무(1958~  )
 
가을은 오랑캐처럼 쳐들어와 나를 폐허로 만들지만 무장해제 당한 채 그저, 추억의 부장품마저 마구 파헤쳐대는 무례한 그의 만행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나는 서러운 정서의 부족이다.

[시평]
‘만추(晩秋)’, 늦가을의 정서는 왠지 서러우면서도, 또 황폐한 듯하다. 온 산이, 온 천지가 가을의 스산함과 함께 화려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으므로, 이러한 풍경과 느낌으로 인하여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서러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황폐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그 가을은, 뜻하지 않게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서는 우리의 삶을 마음껏 휘젓고 떠나는 오랑캐와 같기도 한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가을의 만행을 다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왜, 왜? 우리는 이미 가을에, 그 만추(晩秋)에 점령을 당한, 그래서 만추의 단풍마냥 그리움과 황폐함으로 물들어버린 ‘서러운 정서의 부족’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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