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치스코 교황이 13일(현지시각) 일주일간의 스리랑카·필리핀 순방을 시작한 가운데 스리랑카 내전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첫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이 콜롬보 외곽에서 환영 인사에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스리랑카 내전 진상규명 촉구 “치유·통합 위해 필요한 조치”
종교지도자 만나 폭력 대처 호소… 다양성·평화·화합 강조

[천지일보=정현경 기자] 지난해 한국에 이어 이달 13일부터 아시아 방문에 나선 프란치스코 교황이 ‘불교 국가’ 스리랑카를 방문해 인종·종교 간 화합을 강조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13일(현지시각) 스리랑카를 방문해 “수많은 단체들이 스스로를 전쟁으로 던져 넣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불일치를 화해시킬 능력이 부족한 탓에 인종·종교 간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지난주 나이지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교황은 또 스리랑카의 평화와 부족 간 상처 치유를 위해 내전 기간 동안 발생한 일들의 진실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 도착해 대통령 당선자인 마이트리말라 시리세나의 마중 속에 이틀간의 스리랑카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교황은 도착 후 첫 메시지로 내전 기간 발생한 일들의 진실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며 “치유의 과정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 포함된다. 오래된 상처를 다시 꺼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치유, 통합을 장려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사회기반시설의 개선과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장려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통합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의 이 같은 발언은 지난 8일 대선에서 패배한 마힌다 라자팍세 전 대통령이 유엔 전쟁범죄행위 조사단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05년 최초로 집권한 라자팍세 전 대통령은 타밀족 4만명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음에도 유엔 조사단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교를 믿는 싱할리족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싱할리족이 중심인 정부군과 힌두교도인 타밀족 반군과의 내전이 26년 동안 지속됐다가 지난 2009년 정부군이 민간인 4만여명을 포함한 타밀족 반군을 학살하면서 내전은 막을 내렸다.

스리랑카는 인구의 70%가 불교 신도이며 힌두교도가 13%, 무슬림이 10%, 가톨릭 신도가 7%를 차지하고 있다. 가톨릭 신도의 비중은 낮은 편이지만 신도 중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양 부족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교황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함께 일해야 한다. 목소리 또한 모두 낼 수 있어야 한다”며 “화해와 결속, 평화와 같은 미덕을 잘 키우고 악을 선으로 극복하면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종교와 부족에 관계없이 모두가 스리랑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다양성은 위협이 아니라 번영의 원천”이라며 “정당한 다양성을 존중하고 한 가족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스리랑카의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지도자를 만난 교황은 “종교적 믿음이 전쟁과 폭력의 동기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며 “각각의 종교에 담긴 평화와 공존의 교리에 어긋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 스리랑카를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13일(현지시각)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기념홀에서 열린 종교 간 회동에서 불교 승려들과 악수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불교 국가에서 첫 가톨릭 성인 탄생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기간에 주민 대부분이 불교도인 스리랑카에서 첫 가톨릭 성인이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수도 콜롬보의 갈레페이스그린 해변 공원에서 50여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7세기 네덜란드 식민 당국의 박해 속에 스리랑카 가톨릭교회를 지켜낸 호세프 바스 신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바스 신부의 시성은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복자가 되려면 한 가지 기적을 입증해야 하고 성인으로 시성하려면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두 개 이상 기적에 대한 인정없이 이뤄져 이례적이라고 평가받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시성 규정을 완화해 더 많은 아시아인 성인을 시성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교황은 이날 시성 미사에서도 2009년까지 26년간 이어졌던 다수 싱할리족과 소수 타밀족의 내전을 거론하며 스리랑카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경배는 차별이나 증오, 폭력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헌신과 타인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존중, 경건한 삶의 존중에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이어 내전의 격전지였던 북부 만나르 지역의 마두 성모 성지를 방문했다. 마두 성모 성지는 내전 기간 종교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피란처 역할을 했으나 1999년 포격을 받아 피란민 40여명이 숨진 곳이다.

교황은 이곳에서 “이 땅이 아는 모든 악행과 죄를 씻고 스리랑카 국민이 더 큰 화해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원했다. 그러면서 “먼저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알고 진정한 참회를 한 뒤에야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며 내전 기간 벌어진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교황은 마지막 일정으로 수도 콜롬보의 불교 사원을 깜짝 방문했다. 마지막 일정을 바꾼 교황은 불교 사원을 방문해 경의를 표하고 부처 제자 2명의 사리탑을 공개하는 불교 의식을 참관했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이 다른 사원 방문자들이 하는 대로 신발을 벗었지만 기도를 하지는 않았으며, 막판에 갑자기 결정된 일이어서 방문 시간은 매우 짧았다고 전했다.

교황이 절을 찾은 것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교 사원을 방문한 이후 두 번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후 15일부터 5일간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을 방문한다.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최대 600만명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돼 암살·테러·압사 등이 우려되고 있다.

1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뜨겁게 달아오른 필리핀 국민들의 열기가 무질서와 각종 범죄 가능성 등 진짜 위협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등에 의한 테러 공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필리핀 경찰 당국은 교황 방문 기간에 경찰 2만 5000명을 배치하고 군병력 수천명을 동원할 예정이다. 또 시민들에겐 지난해 8월 교황 방문 당시 질서를 지킨 한국인들을 본받아달라고 요청했다고 ABS-CBN 방송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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