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페셜] 역사 속 을미년, 그 해엔 무슨 일이?
[문화스페셜] 역사 속 을미년, 그 해엔 무슨 일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지난해 12월 8일 발견된 명성황후(1851~1895) 국장 사진(왼쪽 위).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발표된 단발령 공문, 단발령은 11월 김홍집 내각이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이다(아래 맨 왼쪽). 작곡가 안익태의 애국가 친필 악보로, ‘코리아 환상곡’ 끝부분(아래 오른쪽). 명성황후 사진. (사진제공: 양상현 순천향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935년 삼국시대 신라 경순왕
고려에 자진 항복하고 멸망
1895년 ‘을미사변·의병·개혁’
명성황후 시해 등 파란만장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2015년은 을미년 ‘청양(靑羊)’의 해다. 을미년은 육십 간지의 32번째가 되는 해다. 새해를 맞아 한반도 역사 가운데 을미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을 정리했다.

◆935년, 귀족 국가 신라의 멸망

935년 을미년,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나라의 존국이 위태로워지자 신라(경순왕)는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며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및 한반도의 대부분을 992년간 지배했던 국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들 중 하나에 속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 세력이 성장해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됐다.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는데,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해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모 시해한 ‘을미사변’

특히 1895년 을미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 을미의병(乙未義兵), 을미개혁(乙未改革)은 대표적인 사건으로 손꼽힌다.

‘을미사변’은 무장한 30여명의 괴한들이 새벽에 궁궐에 침입해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 민씨를 찾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체에 불을 질러 없앤 사건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의 망루인 동십자각이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괴한들이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암호명 ‘여우 사냥’ 작전이 시작됐던 것. 의심을 피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궁궐 문을 열게 한 일본 낭인들은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궁궐 뒤편의 왕비 침실인 건청궁 안의 옥호루를 습격해 왕비를 찾아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어버렸다. 일본은 증거를 완전히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고종과 황태자,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이 참혹한 현장을 모두 목격했고,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한편 지난해 12월 8일에는 명성황후(1851~1895)의 국장 사진 3장과 시해 후 처음 묻힌 곳으로 추정된 사진 1장이 발견, 공개됐다. 사진은 양상현 순천향대 건축과 교수가 미국 럿거스대 도서관에 소장된 그리피스 컬렉션의 한국 관련 사진 자료에서 발견한 것이다.

◆단발령·서양식 의복 착용 ‘을미개혁’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이 밝혀지기도 전에 일본은 고종을 위협해 다시 조선에서 큰 힘을 얻고자 김홍집, 유길준, 서광범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을 잇는 ‘을미개혁’이다.

친일파가 주도한 을미개혁은 위생과 근대 문물 수용에 초점이 맞춰졌다. 섣불리 정치 개혁을 했다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국 및 소학교 설치, 단발령, 서양식 의복 착용 등이었다.

백성들은 갑자기 음력이 폐지되고 양력을 사용하게 돼 불만이 컸고, 단발령은 양반 유생들의 큰 반발을 일으켰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조선의 전통을 무시하고, 조선인의 혼을 없애려는 일본의 의도가 드러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최초 전국 봉기 ‘을미의병’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크게 분노한 양반 유생들은 고종에게 일본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렸다. 하지만 고종은 자신도 시해당할까 두려워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그러자 왕을 대신해 일본을 몰아내겠다며 전국에서 근대 최초의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를 같은 해 을미년에 일어난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대표적 의병장은 이소응, 유인석 등이 있다.

◆1955년 4월, 안익태 문화훈장 수여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愛國歌)는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가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휘자이자 첼로 음악가였던 안익태가 나라 사랑의 뜻을 담아 개인적인 영감으로 창작한 곡이다. 이전에도 애국가는 많이 있었다.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노랫말과 곡조를 붙인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다.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에 눈을 뜬 갑오경장(1894) 이후 많은 곡이 만들어져 1896년 무렵에는 10여 종이나 됐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준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애국가는 1936년에 만들어져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됐다.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지만,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고 적혀 있다.

애국가는 1984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2007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등에서 국가로서의 법적 근거와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2010년 제정된 ‘국민의례규정’에서도 국민의례를 할 때 애국가를 제창하거나 연주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1955년 을미년 4월 18일에는 현재에 불리고 있는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게 문화훈장이 수여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민법 2015-01-05 00:01:08
을미년은 큰 사건만 있었네

우명수 2015-01-04 22:24:36
저 의미없는 을미개혁을 가지고 일본이 조선에 근대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얼빠진 년놈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지

도토리 2015-01-03 20:54:12
을미년 불운한 나라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울문을 토할 것 같네요. 올해는 좋은일들로만 가득할거예요.

유일 2015-01-03 17:33:06
을미년 청양의 해 시대마다 아픈 사건들이 많은데 2015년에는 기쁜 소식만 있길 바래요.

정금희 2015-01-03 15:20:39
참고로 안익태 선생은 친일파 아니였나요? 잘못 알고 있는건가? 을미년에 많은 일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