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오전 노숙인 박형기씨가 고물상에서 폐품을 팔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추운 날씨였다. 그가 언 손을 녹이기 위해 귓볼을 만지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하루에 두 번 새벽부터 폐품 모아 밥값 벌어
사업 실패로 노숙 시작… 가족 얘기에 눈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손수레에 쌓였던 빈 깡통이 그의 발 앞으로 ‘탁’ 떨어졌다. 깡통은 도로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는 멍하니 깡통을 바라봤다.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깡통을 낚아챘다. “휴, 이것도 다 돈인데…” 겹겹이 옷을 껴입은 박형기(57, 남)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찬바람이 불던 10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용산구 서계동.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이지만 박씨의 손수레엔 종이박스와 빈 병이 절반 이상 실려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모은 것.

박씨는 노숙인이다. 서울역 지하차도에서 지낸다고 한다. 외모는 일흔은 더 돼 보였다. 그의 새하얀 머리와 수염이 고된 세월을 나타냈다. 그가 제 나이를 말해주기 전까진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박씨는 하루에 두 차례 폐품을 줍는다. 종이박스와 빈 병, 빈 깡통은 그에겐 최상품이다. 숙대에서 서울역까지 모두 그의 일터다. 폐품을 주우며 근처를 한 바퀴 도는 데는 2시간이 걸린다. 폐품을 주운 지도 벌써 6년째. 식사는 인근에 있는 노숙인 지원센터를 이용한다. “사는 게 진짜 힘들어. 근데 어쩌겠어.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는 손수레를 끌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피며 길을 걷다 전봇대 아래에서 종이박스를 발견했다. 순간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박스를 가져갈까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박스는 손수레에 차곡차곡 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수레는 종이박스·빈 병 등 고물로 가득했다. 박씨는 10여분 남짓 거리에 있는 고물상으로 향했다.

“이것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해. 요즘엔 파지(못쓰게 된 종이) 줍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해. 많이 돌아다녀야 겨우 모을 수 있어.”

“이거 다 모아서 내다 팔면 얼마나 버세요?” 박씨에게 물었다.

“이거 다 팔아도 막걸릿값밖에 못 받아. 그래도 단돈 천원이라도 내가 버니까 보람돼.” 박씨의 눈가에 웃음주름이 폈다.

▲ 박형기씨가 빈 박스·빈 병이 가득 담긴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다. 이날 박씨가 폐지를 팔아 번 돈은 1400원이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박씨는 폐품을 팔고 1400원을 벌었다. 노력에 비해 적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욕심부리지 않고 찾다 보면 조금씩 모아져. 이따가 더 찾으면 되지.”

고물상 입구로 다시 나온 박씨의 앞으로 한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지나갔다. 따뜻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박씨는 가만히 서서 가족의 모습을 지켜봤다.

박씨는 올해 5월까지 노숙인 입소 시설에 있었다. 술을 반입해서 6개월 입소 정지를 당했다. 올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다.

그도 한때는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다가 사업이 망해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는 지금도 연락을 못하고 있다. 자기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연락은 할 수 있는데 일부러 내가 안 해. 나 따로 너 따로 사는 게 서로에게 더 좋아.”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박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기자양반, 오늘 말동무 해줘서 고마워. 아무도 말 안 걸어주는데 즐거웠어.” 그의 말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박씨는 차갑게 식어버린 손수레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폐품을 주우러 다시 길을 떠났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보였다. 올 겨울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말을 전하는 누군가를 그는 또다시 기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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