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내게는 한 번도 의견을 물어봐주지 않으니….”

얼마 전 들은 한 중진 여당 국회의원의 볼멘 소리였다. 현 정권 출범 후 단 한 번도 청와대나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과연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정치를 하는 것일까. 두루 의견을 구해봐야 할 텐데. 차제에 짚어보고 점검해봐야 할 문제가 없을까. 청와대 문건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필자는 둘 정도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소통부재,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공공 운영시스템에 엉뚱한 사심(私心)이나 비선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는 것이라고. 둘이 따로국밥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한데 엉켜 있는 것일 터.

소통부재의 문제는 현 정부 들어 언론 등 각계에서 이미 끊임없이 지적돼왔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노력을 꽤 기울여온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국민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시정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세월호 참사로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집무공간과 대통령비서실 간의 물리적 거리도 논란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지근거리로 바뀌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을 사용하지만 관저에도 많이 머문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 김기춘 비서실장이 근무하는 위민1관과는 상당한 거리가 된다. 도보보다는 차로 이동해야 할 만한 거리이므로 대면보고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바로 그랬지만 급한 일에도 보고 방식이 주로 서면보고 위주라고 한다.

비서실장은 물론이고 장관이나 수석비서관들이 전화나 직접 대면보고를 통해 어렵지 않게 뜻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오픈시스템이 아닌 비밀주의가 횡행할 가능성이 높고, 이른바 문고리 권력의 문제가 생길 소지도 크다. 예컨대, 부속실에서 정책이나 인사 방향에 관해 ‘VIP’의 뜻이라며 장관이나 수석들에게 의견을 전하더라도 당사자가 이를 구체적으로 재확인하기가 쉽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박 대통령의 순수한 진심이 왜곡되거나 국정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통령 일거수일투족이 비밀이요, 대통령과의 대면보고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한다면 말이다.

대통령이 필요할 때 전화로 물을 게 아니라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을 수시로 접견해야 한다. 취재기자들이나 일반국민과의 자연스러운 간담회를 통한 소통기회도 더 많아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면 민심과 멀어진다. 소통에 힘쓰지 않으면 대통령이 구중궁궐에 갇히게 되는 것처럼 되고 ‘십상시’의 정치공학이나 암투가 발호하면서 맑아야 할 권력의 호수는 물이 썩는다. 위정자는 이 점부터 바로 인식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국민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둘러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박 대통령이 7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한 ‘찌라시’ 발언이 주목을 끌었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 주변 비선 실세논란과 문고리 권력을 보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찌라시’ 발언은 국민들 사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많은 국민들을 혼돈과 멘붕 상태로 몰고 갈 정도로 미덥지 않고 투명하지 않은 국정시스템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할 시점인 것도 사실이다. 잇단 인사실패를 비롯한 국정 운영 전반을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이 곱기만 했을까. 밀려드는 낭패감 허탈감으로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느끼기에 현 정부 출범 후 여론은 지금이 최악인 듯하다. 문건유출 사건의 경위와 진상이야 검찰 수사결과가 나와 봐야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와대 문건의 일부 내용은 진실과 거리가 먼 작문일 수도 있다. 허접한 찌라시 수준이거나 허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각종 정책이나 인사와 관련한 공공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의혹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공공시스템에 사적인 입김이 개입돼 있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인사청탁을 두고 청와대와 갈등을 겪었다’며 비선개입 의혹을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부 장관의 고백까지 ‘유탄’처럼 터져 나오면서 소통의 진성성과 시스템의 객관성에 고개를 저으며 답답해하는 층이 늘고 있다. 잦은 검찰 고소 고발로 인한 국민의 피로감과 심적 기상상태도 무겁기만 하다. 진위와 상관없이 국민이 공공시스템을 투명한 것으로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경위야 어쨌든 민심 이반이 두려운 형국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땅에 떨어지게 만든 인사들을 애써 멀리해야 한다. 정윤회 씨와 문고리권력 3인방, 박지만 씨 가운데 일부는 해외에라도 내보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청와대의 인적 구성과 조직배치도 재고해야 한다.

문득 떠오른 경귀 하나가 있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계신공구(戒愼恐懼)다. ‘매사 모든 일에 삼가하고 또 삼가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 터. 국정운영이나 대인관계에서 모두 금과옥조로 삼을 만한 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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