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인터스텔라’를 향한 오만과 편견?

[천지일보=박미라 기자] 미국에서는 비난과 혹평에 시달리며 실망스런 성적을 보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 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일별 박스오피스(전날 집계) 순위에서 ‘인터스텔라’는 1위로 39.4%라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했다. 2위인 한국영화 ‘빅매치(22.4%)’보다 2배다. 또 이 영화의 누적 관객수는 841만 4000명이고 누적매출액은 672억 9000만 원에 이른다.

▲ [인터스텔라] 지난 11월 마지막 주 국내 박스오피스 (사진출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북미지역 성적은 어떨까. 미국의 영화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인터스텔라’는 지난 주말 수익인 1573만 달러(약 174억 7100만 원)를 추가해 총 1억 4703만 달러(약 1633억 6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국내보다 약 2.7배 정도의 액수이나 국내와 북미의 인구비율로 따지면 우리나라에서의 성적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게다가 인터스텔라의 총 제작비는 1억 6500만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자국 내에서의 흥행수입보다 2000만 달러가 더 들어간 것이다.

만일 자국에서만 개봉했다면 손익분기점도 한참을 못 넘긴 그야말로 ‘망작’이 될 뻔 했으니 좀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현재 670억을 벌게 해준(향후 추가적 관객과 온라인 등의 2차적 저작물에 대한 수입까지 800~1000억 이상 추정) 우리나라가 인터스텔라와 놀란 감독의 구세주다.

▲ [인터스텔라] 북미 영화 박스오피스 (사진출처: 박스오피스 모조)

◆천재적 전작들에 대한 부담감인가 or 천재감독의 과욕인가

개봉 전 배급사에서 푼 홍보기사들의 위력은 상당했다. 기사들은 사실로 인지됐다. 메멘토, 다크나이트, 인셉션으로 연달아 세계를 놀라게 한 놀란이 천재감독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10점 만점에 9, 10점을 남발해 평점은 8점대를 유지했고 가끔 1점을 주며 불평한 관객은 이해력 딸리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으로 매도당하고 있었다. 불평한 관객은 지루했다고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피력했을 뿐인데 다른 네티즌들에게 ‘몰상식한 얼간이 취급’ 공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 초반 홍보 언론에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세뇌됐던 본 기자도 그 혹평을 단 네티즌을 비웃으며 기대감에 부푼 가슴을 안고 극장으로 달려갔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또 다시 편견에 휩싸여 경솔하게 비웃어버린 그 생면부지의 혹평가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동시에 격한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물론 세상 어떤 영화도 관객을 100% 만족시킬 순 없다. 아무리 명작이라도 100% 완벽한 영화란 없듯이 말이다. ‘대부’도 ‘살인의 추억’도 어떤 이들에겐 냉혹한 혹평이 내려진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은 명실공이 명작임에 틀림없다. 명작이 범작이나 졸작과 뚜렷한 차이점은 이견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카사블랑카나 대부가 역대 영화 중 최상위에 있다는 것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현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칭찬하는 작품을 폄하했다가는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것. 왜일까.

인터스텔라는 대단한 작품이다. 양자역학이나 천체물리학 등의 방대한 이론들을 겨우 3시간 안에 녹여냈으니 말이다. 그것도 가족애, 나아가 인류애라는 단순하면서도 어렵고 숭고한 주제를 적절히 구사한 스토리텔링이었다. 이 영화에 들어간 이론들만도 놀란 감독의 장점 중 하나인 기발한 액션이나 판타지 신(scene)만큼이나 화려함을 자랑한다.

아인슈타인이 세운 일반상대론과 특수상대론을 기반으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뉴턴으로부터 나온 관성좌표계며 갈릴레이의 역학법칙들, 데카르트와 호이겐스의 원심력, 킵손의 웜홀이론 등을 알아야 하니 놀란 감독의 친동생이자 이 작품의 작가가 대학까지 가서 4년이나 공부했다는 점도 그럴 만하다. 하지만 진짜 대학생들처럼 공부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에 놀란 감독은 그 특유의 천재성으로 이 이론들의 실상을 뛰어난 상상력으로 멋지게 구현해냈다. 특히 VFX(Visual Effect: 흔히 CG라고 말하는 시각적 특수효과)를 지양하는 고집으로 많은 판타지 장면들을, 보통의 감독들은 꿈꾸기 어려운 비싸고 비싼 세팅으로 더욱 생생한 리얼리티를 선사했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할까.

▲ ‘인터스텔라’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제작진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를 본다는 것은 뭔가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느끼기 위해서 돈을 내는 것

웰메이드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실은 수십, 수백 가지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다 지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각기 다양한 견해와 사상으로 지배하는 인간이 쓰고 인간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보통 기본에 충실한 영화는 성공한다. 근데 왜 인터스텔라는 하품을 하면서 볼 수밖에 없는지 관객의 입장으로서 주요한 이유 딱 세 가지만 들어본다.

첫째는 초반, 중반, 후반 과도하게 끌고 가는 감정 신의 과한 표현이다. 딸과 헤어지며 징징. 아들과 헤어져도 역시. 앤 헤서웨이와 헤어져도 마찬가지. 이도 모자라 쇠막대 네 개를 붙여놓고 로봇이라고 하는 애와 헤어지면서도 징징 운다. 헤어지는 신만 몇 개가 되는지 모른다. 한국 영화의 고질병인 노골적 신파 신들도 이보다 더 지루하긴 쉽진 않을 것이다. 유난히 감정 신만 나오면 감독이 한국말로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게 환청으로 들린다. ‘난 유니크하고 인텔리한 스토리텔링과 테크니컬뿐 아니라 감정 신도 꽤 잘할 수 있어, 볼래?’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힘을 너무 줬다. 그렇다고 대사도, 행동도, 캐릭터도 아무 것도 독특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하품을 초래한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매튜의 딸의 유레카 컷 등은 정말 놀란 감독이 연출한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민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 맷 데이먼의 빛나는 연기력이다. 극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도 매튜와 앤이 만 박사를 수면캡슐에서 꺼낼 때 벌떡 일어나 매튜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맷 데이먼의 모습은 죽음의 절망 속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 사람을 만난 심정을 제대로 보여준다.

두 번째 이유는 나무에 집중하느라 숲을 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건을 갖춘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나 다양하고 심오한 과학이론들을 극에 녹이는 데 집중하다보니 완성도 있는 캐릭터의 구축이나 사건과 인물의 개연성과 그에 부응하는 설득력을 갖춘 감정의 흐름 등의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있었다. 물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은 조나단 놀란은 ‘메멘토’와 ‘다크나이트’를 쓴 대단히 훌륭한 작가다.

예를 들어 아무리 시공간의 왜곡이라 해도 5차원의 블랙홀에서 주인공 매튜가 자신의 과거를 보는 장면은 백투더퓨처 이론인건지 대체 어떤 이론인지 알 수가 없다. 인류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대의명분을 위한 사기극을 위해 자신의 친딸을 속여 사지로 보내버린 박사의 속사정이나 자식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블랙홀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행동에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에 블랙홀 내부의 환상적 비주얼조차 그렇게 크게 흥미롭지도 않다.

특히 만 박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기 살려고 본부에 거짓보고까지 하고 매튜도 죽이려했던 그가 플랜B를 성사시키겠다고 말도 안 듣고 무리하게 도킹하다 죽었다. 우주에 오래 있다보니 좀 정신이 돌았나보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듯하다. 맷의 빛나는 연기도 이로 인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셋째,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너무나 설명적이다. 방대한 우주이론에 기인한 우주여행 신들과 인물들의 의도와 갈등 사건들을 바쁘게 오가며 살피다가 대사를 놓치거나 이해가 더디면 어느 새 영화는 나를 컴컴한 우주 공간에 혼자 버려두고 저 멀리 달려가고 있다. 왜 저러지? 저 인물이 저러는 이유는 뭐야? 내가 뭘 놓쳤지 하고 고민하다 보면 그저 감독의 머릿속에 있던 그닥 흥미롭지도 않은 블랙홀의 비주얼만 감상하다 나와야 한다.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설명적 부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해가 되고 재미있게 표현됐다면 설명적이라도 상관없다.

한 예로, 중요한 이론에 대해 반드시 관객을 이해시켜야 극을 따라갈 수 있는 단계에서 매튜는 앤과, 괜히 동면에 들어갔다가 혼자 23년 늙어버린, 그리고 거의 그것만 보여주려고 등장했다해도 과언이 아닌 ‘로밀리’, 이들 셋이 함께 둘러 앉아 이론에 대해 서로 대화하는 척하며 관객들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거부감을 준다.

게다가 설명하는 것도 지겨운데 매튜와 앤을 각각 바스트샷에서 얼굴로 단속적 줌인을 반복함으로써 관객의 멱살을 잡고 강제적으로 수업에 집중시킨다. 그렇게 집중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기에 영화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적수준을 의심하고 자책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 [인터스텔라] 수면캡슐 앞에 선 세 우주인 (사진출처: 다음 영화)

◆왜 말을 못 해? 아니면 아니라고 왜 말을 못 해!

우리나라를 민주주의로 이끌었지만 오늘날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마녀사냥’이라는 부정적 기능도 낳은 군중심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군중심리’는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으로 프랑스대혁명을 겪은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이 처음 제시한 이론으로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근간이 되기도 하다. 위키백과에는 이미 군중심리의 한 예로 한국의 특정영화에 대한 ‘관객쏠림현상’을 제시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잣대가 있고 주관이 있는데 왜 군중심리에 동화되는 것인가.

여기엔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사람이 군중심리에 휩쓸리게 되면 ‘인지부조화(1950년 대 미국 심리학자 리언 페인팅어가 처음 제시한 용어)’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모순되는 현상, 이 현상으로 스스로 느껴지는 불합리, 불편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럴 때 인간은 보통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군중에 속해 있는 이유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해서 영화의 20%만 재미있고 80%는 지루했다고 느낀 관객(또는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자신과 같은 견해를 나누지 못한 관객)이 있을 경우 같은 작품을 완벽하다고 극찬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인지한다. 80%라면 명백히 재미없는 영화였다라고 해도 무방할 만하지만 지적인 수준 운운하는 옹호론자들을 보며 재미없다고 했다간 자신은 그들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모자른 왕따’가 돼버릴 것 같다.

그래서 나머지 20%의 재미를 합리화시켜 누군가 그 작품의 훌륭한 점을 디테일하게 적어보라고 할 일은 절대 없으니 그냥 속 편히 다수에 편승해서 그 다수가 쓰던 표현을 차용해 엄지를 쳐드는 것이다. 실상 엄청나다는 평들을 읽어보면 이론들이 어쩌구저쩌구 하며 모호한 서술을 해놓은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 (사진출처: KBS)

관련된 한 예로 얼마 전 진중권 교수가 SNS에 ‘명량은 졸작이다’라고 했다가 이슈가 된 일이 있었다. 이슈가 된 이유는 진중권 교수가 ‘명량’을 ‘졸작’이라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장으로 대중에게 뭇매를 맞은 탓이다. 진 교수가 그런 과격한(혹은 적확한) 표현을 올린 이유도 명량을 폄하하자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결국 군중심리에 대한 경계와 주의의 표현이었단 것이다. 물론 졸작이라 느낀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유 주관이다. 주제가 좋고 몇 장면에 가슴 뭉클했다고 명작이라 정의내리는 것도 다만 개인적 견해인 것이다.

물론 특정 영화를 옹호하는 그들 모두의 행동이 군중심리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정말로 지적 수준이 높으며 감독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모두 이해하며 놀라움과 감동으로 영화를 감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므로), 또는 20~30%의 재미만으로도 그것이 너무 커서 나머지 70~80%의 지루한 추억은 상쇄해버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없고가 딱 50%였다 해도 지루한 작품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만 감동해도 ‘재밌는 영화’라고 말할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그처럼 인간의 사고는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군중심리가 발달한 것은, 아닌 걸 아니라고 용기 있게 말했다가 숱한 목들이 달아난 피비린내 나는 역사들을 겪어오며 생존을 위해 자생된 본능적 정서일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흥행 공식은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로 진행되는 것이다. 먼저 홍보성 기사에 혹하고, 놀란 감독의 이름에 혹하고, 이미 판을 섭렵한 다수를 따라 이 영화를 욕하는 사람들은 지적 수준이 낮은 모양이라 무의식적으로 비웃는다. 그래서 나의 지적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의기양양 영화관에 가고, 실상을 본 후 살짝 당황하게 되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한눈 팔았나보다 자책한다. 혹자는 이렇게 훌륭한 영화는 감히 팝콘 먹으며 보기 미안한 영화라 했다. 20%의 재미만으로 인지부조화에 빠져 또다시 엄지를 치켜 올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터스텔라를 극찬하는 관객들 대부분이 극구 부인할 수 있지만, ‘헐리우드’라는 영화계 메이저로 군림하는 집단에 대한 인식과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네임 밸류가 만들어낸 헤게모니(이것이 자연히 군중심리로 편승된 것)의 작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씁쓸하지만 ‘가진’ 영화의 극장점유율도 한몫 크게 한다는 하나마나 한 얘기도 덧붙여본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바퀴들이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연유로, 살짝 궤도를 벗어난 ‘인터스텔라호’에 한국인 승객만 1000만 명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인터스텔라] 놀란 감독과 매튜 매커너히 (사진출처: 다음 영화)

◆왜 나와 다르다고 비난하는가

지난 달 10일 상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의 흥행에 대해 적잖이 놀랐던 놀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관객들의 지적 수준이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놀란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발언처럼 느껴진다. 여러 가지 데이터나 실제적인 면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학습능력과 지적수준은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 이 말은 듣는 사람에게 상당히 민망한 것이다. 우리를 칭찬하듯 들리지만 이 말은 곧 자신은 ‘지적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좋아할 ‘지적수준이 높은’ 영화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의 이러한 입장이나 이 영화를 찬양하는 관객들의 견해는 다르지 않다.

어차피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만든 상업 영화를 놓고 ‘인텔리전트 레벨’을 운운하는 건 순수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망하는 태도다. 그럴 바에 차라리 앞으로는 영화관람 등급을 나이가 아닌 학벌로 정하는 건 어떨까. 이 영화 관람가 ‘대졸이상’ ‘이공계 전공 환영’ 이런 식으로 말이다.

‘웜 홀’이란 말을 처음 듣고 ‘따뜻한 구멍이라고?’라 생각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 거라 확신한다. 벌레가 사과의 이쪽에서 저쪽 편으로 가기 위해 표면을 따라가지 않고 사과를 파고 들어가 빠른 속도로 다른 표면에 도달한다는 웜홀 이론(벌레구멍 이론)도 킵손(인터스텔라에 자문역 프로듀서로 참여)이라는 물리학자가 주장한 가설이지 그것이 정말 우주공간에 실재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다양한 이론의 기반이 됐다고 하나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실상들은 논리적이지도, 증명할 방법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작가와 감독의 지극히 주관적인 상상적 산물일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과학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마치 이 영화가 웜 홀이나 블랙홀(지난 9월 미국의 한 여성물리학자가 블랙홀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빅뱅이론의 오류를 수학적으로 입증한 이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한 것 마냥 열광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세상에 제시된 인간의 학문 중에 어떤 것도 100% 완전한 것은 없다. 과학적 이론들도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다양한 모순점과 불확실성을 안고 확률적으로 제시된 선택적 가설일 뿐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예로 1+1=2는 진리인가? 아니다. 빵 한 개를 가져와 여러 조각을 내 그 중 두 조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수긍한다고 그것이 진리가 될 순 없다는 말이다. 어느 날인가 어떤 과학자가 짠하고 나타나 이제껏 통용되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법칙들을 뒤집고 깨부술 수 있는 것이 인학의 속성이다.

▲ 인터스텔라 (사진출처: 다음 영화)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러한 지식들을 대하면 진리나 되는 것처럼 열광하고 동경하는 것일까. 상대성이론이나 웜 홀을 몰라서 혹평을 하는 거라고 침을 튀기며 비난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다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도 이 거대하고 미스터리한 우주 속의 한 점과 같을 뿐, 죽고 사는 문제보다 더 한 것이 있을까. 절대적 진리라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과, 빛과 비와 공기의 존재일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자신의 가진 지식이 뛰어남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훌륭한 감독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 개인적 주관이나 오만으로 다른 사람의 피 같은 돈을 ‘자기만의 영화’ 제작에 써버리는 건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의 인터뷰 중 인터스텔라는 자신의 딸을 위해 제작한 영화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면 감독은 자신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야 한다는 의미다. 좋은 영화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돼야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근대 과학의 기원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운동’ 이론에 따르면 모든 만물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인류를 위해 존재했던 천재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법칙처럼, 앞으로는 천재 감독 놀란도 어깨의 ‘뽕’을 빼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메멘토나 인셉션, 다크나이트 같은 작품으로 다시금 우리에게 즐거운 놀라움을 선사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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