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초겨울이 돼 날씨가 추워지면 포항, 경주, 대구를 중심으로 포장마차나 대포 집에 어김없이 등장 하는 술안주가 과메기다. 포항 지역의 과메기 생산업자들은 11월부터 분주해 진다. 이 과메기, 가메기는 경상도 사투리고, 원래 이름은 ‘관메기(貫目魚)’이다. 지금은 관메기를 만들 때 꽁치를 재료로 하지만 예전에는 청어(靑魚, 비웃)를 재료로 했다.

청어에 대한 기록은 ‘자산어보’ ‘징비록’ ‘지봉유설’ ‘성호사설’ ‘도문대작’ 등에 많이 나온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명나라 말(17세기 중엽)에 요동 지방에 갑자기 나타나 신어(新語)라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전에 많이 나왔다가 다시 드물어졌고, 정조 무오·을묘년(1798~1799년)에 다시 나타나서 약간 천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비웃은 서해 청어를 일컫는 서울말이다.

‘명물기략(名物紀略 1870년)’에 보면 “청어는 값싸고 맛이 있어 서울의 가난한 선비들이 잘 먹는 고기라 지적하고 비유어(肥儒魚)”로 표기했다. 선비를 살찌게 하는 고기라고 해 청어를 ‘비유어’라 하였고, 이 ‘비유어’가 음운변화에 의해 ‘비웃’이 된 것이다.
관메기에 대해 ‘규합총서’에서는 “비웃 말린 것을 흔히 관목(貫目)이라 하나 잘못 부르는 것이다. 관목어란 비웃을 들고 비춰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해 말갛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린 것으로, 그 맛이 기이하니 비웃 한 동에 관목 하나 얻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눈이 맑아 마치 두 눈이 뚫린 것처럼 보이는 신선한 청어를 지칭할 때 관목이라고 하며, 이 신선한 청어를 얼 말린(동결건조) 것은 관메기라 한다. 경상도에서는 이 청어를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해 뒀다가 먹었다.

관메기는 청어를 배도 따지 않고 소금을 치지 않은 채 그냥 얼 말린 것이며, 조기처럼 염장을 해서 말려 먹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최고의 맛은 훈제품(燻製品)인 연목어(烟目魚)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청어는 연기에 그을려 부패를 방지하는데 이를 연관목(烟貫目)이라 부른다”고 쓰여 있다. 이 물고기 훈제 법의 대표적인 것은 행주산성에서 왕실(王室) 진상품으로 바쳤던 박달나무로 훈제한 연웅어(烟葦魚)라 할 것이다.

‘음식디미방’에는 “말린 고기를 오래 두려면 연기를 쐬어 말리면 고기에 벌레가 안 난다”고 하였다. 이렇듯 우리는 오래전부터 훈제법이 전해 내려왔던 것 같다.

심연섭의 수필에 보면 “농사의 부엌 아궁이는 으레 연기를 내게 마련이다. 굴뚝이 낮은 탓이겠지만 시골 사람들이 굴뚝을 높이지 않는 것은 아마 열량의 절약을 위해서 일 것이다. 아궁이에 송엽을 땔 때 부엌 안은 연기로 가득하게 되고 자연 통풍이 필요하게 된다. 채광(採光)을 겸한 그 통풍구(通風口)가 추녀 바로 아래다. ‘뚫은 살창이다’ 그 곳이 바로 청어의 건조장, 비웃 몇 두름을 겨우내 그 살창에 걸어두면 송엽의 향연으로 훈제가 돼 이른 봄에는 빳빳한 관목이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훈제법이다.

특히 이 관메기를 짚불에다 서서히 구워 껍데기를 벗기면 빨간 속살이 나오는데, 아주 별미다. 관메기나 연관목을 그대로 찢어 술안주로 먹기도 하지만 봄에 토막 내어 냉이, 쑥 콩나물을 섞어 죽을 쑤어 먹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게 바로 관메기죽, 연관목죽이다.

고려말 학자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 보면 “쌀 한 되에 청어 마흔 마리만 주니 세상이 어지럽고 흉년이 들어 백물(百物)이 귀해져 청어마저 드물구나”라고 쓰여 있다. 청어가 얼마나 지천이었으면 쌀 한 되에 마흔 마리를 주는데도 적다고 했을까.

조선 중기의 학자 허균이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촌로(村老)에 들으니 병자(1876), 정축(1877)에는 흉년으로 곡물은 얻어먹을 수 없고 청어는 한양으로 많아 들어오니 청어만 먹다가 중독(中毒)으로 죽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해 산지(産地)에서 비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1832년에 쓰인 ‘경상도읍지’를 보면 “영일만의 토산식품 중 조선시대 진상품으론 영일과 장기 두 곳에서만 생산된 천연 가공의 관목청어뿐”이라고 했다.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1911년)’에는 황해도 각지에서 약 30년 이래 청어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에는 동해에서 1년에 5000만㎏이나 잡혀 청어알만해도 영일만(迎日灣) 연안에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너무 많이 잡혀 한양 사람들 수천 명을 중독 시키고 산지에서 비료로 쓸만큼 지천이었던 청어가 서해는 물론 동해에서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고, 그 대체 어종으로 꽁치가 쓰여 지고 있다. 포항에서는 부산지역의 꽁치 잡이 어선들이 남쿠릴 열도 해역에서 잡아오면 이를 냉동 보관해 두었다가 추위가 시작되면 관메기를 만들어 출하하기 때문이다.

목(目)을 포항 구룡포 지역 사투리로 ‘메기‘로 발음해 관목어가 ’관메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해 과메기로 굳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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