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물망초 주최로 열린 ‘국군포로 어르신 초청 간담회’가 진행 중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6.25때 잡힌 국군포로
북한 탄광서 노역생활
“인천공항 오자 눈물만…”
포로 500명, 아직 北에

[천지일보=김민아 기자] “1953년 7월 14일 6.25전쟁 마감전투가 있었습니다. 휴전을 13일 앞둔 날이었죠. 전 탱크병이었습니다. 탱크 안에 갑자기 수류탄이 날라 왔습니다. ‘쾅’ 소리에 정신을 잃었죠. 눈을 떠보니 저는 북한의 포로가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53년 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국군포로 간담회에 참석한 탈북국군포로 이선동(가명, 85) 옹이 깊은 회상에 잠겼다. 그는 1950년 8월 15일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21세였던 이 옹은 미24사단 소속부대에 배치됐다. 그는 앞자리에 K가 새겨진 군번을 받았다. 조선 사람이라는 의미다. 전투에 돌입하자 38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싸움이 계속됐다. 그는 최전방에 탱크를 세우고 적진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던 중 탱크로 날아온 적군 수류탄에 정신을 잃고 북한군에 포로로 끌려갔다.

북한에서의 삶은 힘겨웠다. 그는 국제법이 있으니 금방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전협정 당시 김일성은 전쟁복구를 위해 국군포로를 잡아두기로 결정했다. 김일성은 잿더미가 된 북한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경제노선을 발표했다. 중공업 우선 발전,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 등이었다. 국군포로들은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 이 옹은 35년간 탄광에서 일했다. 사회 복귀 후에도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감시를 계속 받았다. 철장 없는 감옥이었다. 결국 2006년 탈북을 감행했다. 죽더라도 고향에 묻히겠다는 심정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이선동 씨~’하고 불렀어요. 그 목소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죠. 드디어 대한민국 내 조국에 왔다는 감격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 옹은 중국을 거쳐 50여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도심에 즐비하게 세워진 고층빌딩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 자동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최전방에서 3년간 피 흘려 싸운 것에 보람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국군포로는 6.25전쟁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측에서 송환되지 않은 국군 실종자를 일컫는다. 북한은 지난 1998년 6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통해 6.25전쟁 포로들을 정전협정의 요구대로 전원 송환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에 생존한 국군 포로는 5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노력해온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은 “격동기 나라를 구하고자 한 몸을 바쳤다가 역사의 조난자가 되신 어르신들께 감사하고 죄송하다”며 “온 국민이 이 시대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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