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을 가진 구한말의 언론인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였던 그는 올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이기도 하다. 영국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게 됐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짚어보도록 한다.

▲ 1907년 내한해 우리나라 의병 사진을 많이 찍었던 영국 데일리 메일(The Daily Mail)지의 매켄지 기자가 찍은 대한매일신보사의 초창기 편집국 모습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대한 동포를 구하라.”

푸른 눈을 가진 37세의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은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1909년 이국땅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앞길이 구만 리 같았던 영국(英國) 언론인 출신의 청년 배설은 아무런 연고 없는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제국에서 일제의 탄압과 위협에 시달리다 옥고를 치른 후 조용히 숨을 거뒀다.

▲ 대표적 항일 언론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1909년 5월 1일 양화진으로 가는 배설 선생의 상여를 따라 조문객들의 끊임없는 발걸음이 뒤를 이었다. 1909년 5월 5일 서울 강남 영도사에서 배설 선생을 위한 추도식이 거행됐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추도사를 전했다. 양화진에 안장된 배설 선생의 묘지는 통곡하는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신문은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와 조문으로 전면을 덮었다.

▲ 양화진으로 가는 배설 선생의 상여를 조문객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영국인 베델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명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편의를 제공해주라는 특허장을 하사했던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배설 선생의 비문. 일제에 의해 비문(장지연 선생이 지음)이 깎여진 모습(오른쪽)으로 1968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원래 비문 내용을 다시 새겨 깎여진 묘비 옆에 새 비를 세웠다(왼쪽). ⓒ천지일보(뉴스천지)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암울했던 시대.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슬픔에 빠뜨렸던 푸른 눈의 청년 배설은 과연 누구인가? 올해로 광복 69주년을 맞아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였던 배설을 통해 국경도 초월해 평화와 정의를 이루고자했던 언론인의 시대적 소명에 대해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격동의 세월 가운데 대표적 항일 언론으로,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논설과 기사를 연일 보도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무역가에서 항일 언론지
‘대한매일신보’ 사장에 이르기까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한국에서 신문 발행 후 고종황제로부터 한글 이름을 하사 받음)은 대학 수준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을 졸업하고, 1886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에 니콜 엔드 컴퍼니(Nicolle & Co.)라는 무역상을 차려 운영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10일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돼 한국으로 파견됐다.

▲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발행됐던 대표적 항일 언론으로,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논설과 기사를 주로 보도하였다.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제3권 제16호 (사진제공: 문화재청)

배설은 서울에 도착한 후 4월 14일 통신원으로서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최초로 송고한다. 하지만 배설은 기사 송고 후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당시 배설 선생은 “크로니클지는 편집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이에 크로니클지는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크로니클지는 나를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며 해임 이유에 대해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동맹관계로서 배설 선생이 자기의 명예와 생계를 먼저 생각했다면 신문의 편집 방향에 따라 친일적인 기사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문사의 편파적인 논조를 좇지 않고 조선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며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양심을 꿋꿋이 지켜냈다.

배설은 크로니클지를 그만둔 후 우국지사 우강(雩岡) 양기탁 선생과 뜻을 같이 하여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KDN)를 창간했다. 이때부터 배설 선생은 양기탁 선생을 비롯한 백암(白巖) 박은식, 단재(丹齎) 신채호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사를 낱낱이 폭로하는 항일 언론으로서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배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우강 양기탁 선생. 신보사의 편집과 주요 업무를 맡았다.

◆항일 언론으로서의 본격적인 투쟁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됐을 당시. 대한 국민은 일본의 한반도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을 격렬히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장성관방장관을 역임한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요구한 황무지 개간권은 ‘대한 땅의 황무지 개척 및 경영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나가모리에게 50년간 위임하고, 그 후 다시 50년간 사용권을 연장해 달라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또한 일제가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개간권을 요구했다는 것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국제여론에서 日당국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일제의 얄팍한 꼼수였음을 꼬집을 수 있다.

당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받아 들였다면 대한 국토 2/3가량이 일제에게 넘어가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한 국가로서 계약을 맺은 것으로 국제법에 의거 국토 2/3가량을 100년 동안 일제에게 대여해줘야 하는 아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제법의 경우 분쟁당사국 쌍방 합의 없이는 재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상대가 강대국일 경우 재판에 회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 일제치하 36년 해방 후에도 일본이 빼앗은 국토를 순순히 내놓지 않는 이상, 해당 국토를 100년 동안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요구가 부당한 한반도 침략 행위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설을 내고, 국민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언론지로서의 투쟁을 그치지 않고 이어갔다.

▲ 이준 열사 분사(憤死)를 호외로 다룬 대한매일신보. 배설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애국지사들의 자결순국사건을 다뤄 국민의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궁중으로 군대를 끌고가 총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며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배설 선생은 일제의 총칼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을사늑약을 상세히 보도하고, 애국지사들의 자결순국사건을 다뤄 국민의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배설은 고종황제가 영국 트리뷴지(The Tribune)의 특별통신원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에게 밀서를 주어 트리뷴지에 보도됐던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 밀서의 사진과 함께 전재(轉載) 보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적극 알렸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논조를 폈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1907년 2월 발기)의 총합소가 되었으며, 비밀애국결사대인 신민회본부로 중요한 비밀 거점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배설 선생은 우국지사들이 항일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보를 내주었던 것이다.

◆일제의 언론 탄압과 배설 선생의 재판 회부

▲ 대표적 항일 언론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이 일던 1907년 국한문혼용판이 일반 대중을 계몽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해 5월 23일 한글판을 간행한다.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영문판, 국한문혼용판, 한글판 등으로 총 2만여 부에 이르는 신문을 발행해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하지’라는 영국인이 발행하던 ‘서울프레스’를 통감부의 기관지로 삼고 대외 홍보를 강화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연설을 통해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 마디가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통탄했다. 이는 그만큼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민족지로서 국민 의식을 깨우는 힘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일본은 1907년 7월(광무 11년) 급기야 ‘광무신문지법’을 제정해 본격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으므로 영국인인 배설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治外法權)상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사에 걸었던 영국기. 배설 선생은 영국인 소유의 치외법권 지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신보사에 영국기를 게양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이에 일본은 영국 총영사를 통해 눈에 가시 같은 배설을 2차에 걸쳐 재판에 회부한다. 배설은 1차 재판(1907년 10월 14일)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백성을 선동해 공안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6개월간의 근신과 3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2차 재판은 1908년 6월 15일 스티븐스 암살사건 보도 직후 ‘소요와 무질서를 조장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 400만환의 벌금을 부과 받게 됐다. 배설의 1, 2차 재판 벌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답지한 성금으로 대납하고도 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재판 다음 해인 1909년 5월 1일 배설 선생은 일제의 위협과 신문발행의 방해, 자금난, 옥고 후 부작용 등으로 건강을 해쳐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선생의 역사적 의의

대한매일신보는 구한말 발행된 항일 민족지로 항일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윤활유적인 역할을 하며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배설은 치외법권 아래서 일본의 검열을 피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일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하며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1968년 정부는 항일 운동을 펼쳤던 배설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배설은 한반도를 향한 일제의 부당한 침략 행위에 기자로서의 양심과 펜으로 맞서 싸웠던 대한민국 언론
인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했던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배설 선생이 살던 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번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현재 배설 선생의 자택이 위치해 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번지는 재개발 진행 중에 있다. 그의 자택을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도 크지만 당시 항일 언론운동 선구자로서의 업적을 기릴만한 동상과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는 100여 년 전 선조들이 배설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항일 언론운동의 선구자 4현(배설·양기탁·박은식·신채호)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광복 70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갔던 배설 선생을 기억하며, 우리 선조들이 했던 약속을 이행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 속히 열리길 소원한다.

이경숙 기자/ thetop80@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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