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바꾸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지난 1996년과 2005년에도 같은 주장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과 국보 1호 숭례문의 번호 교체론이 나온 가운데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와 한글 관련 단체에서는 10만인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혜문스님 “숭례문 부실·비리로 국보 1호 가치 잃어”
한글단체 “훈민정음해례본 국보 1호로 지정” 촉구
조선총독부가 조선보물 1호로 지정… “번호 무의미”
온라인서명 1주 만에 2만 넘어… “혈세낭비” 비판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바꾸자는 주장이 20년 만에 다시 제기됐다. 지난 1996년과 2005년에도 같은 주장이 제기된 바 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방화로 절반 이상 소실됐다가 5년 만에 복원한 숭례문이 화재와 부실 공사에 비리까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와 (사)우리문화지킴이를 중심으로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을 위한 서명운동 추진위(혜문스님, 김상철 공동대표)’가 발족됐다. 이날 추진위는 “숭례문을 국보 1호에서 해지하고 훈민정음해례본(국보 70호)을 국보 1호로 지정해달라”는 10만인 서명운동 발대식을 했다.

훈민정음 국보 1호 추진 서명운동에 앞장서는 혜문스님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국보 1호 교체 논의는 숭례문이 불타기 전부터 거론됐다. 부실과 비리로 얼룩진 숭례문에 국보 1호의 가치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지정하는 일은 1945년 해방 직후 했어야 할 일이었다”며 “언제가 됐든 바꿔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초 나선화 문화재청장도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지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보물 1호로 지정됐으며,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조선총독부가 숭례문을 조선보물 1호로 지정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출입한 문이었기 때문이라는 연구보고가 있다. 이런 이유로 숭례문은 그간 왜색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교체 대상에 올랐다. 2005년에는 감사원이 국보 1호를 바꾸자고 문화 재청에 의견을 개진하기까지 했다. 2008년 1월엔 국보에 붙은 일련번호를 모두 없애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숭례문 화재로 문화재 청장이 쫓겨나면서 흐지부지됐다.

한편 국보 지정 권한을 가진 문화 재위원회는 교체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보의 번호는 가치 순서가 아니고 단순한 관리번호”라며 국보 1호라는 번호가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1호가 갖는 상징성을 배제한 행정편의주의라는 비판이 많다.

혜문스님은 국보 번호 폐지는 “조심스러운 문제”라며 “무형문화재, 천연기념물, 사적 이러한 것도 동시에 폐지할 것인가는 추후로 논의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대로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은 “지난 1996년과 2005년에는 무산됐으나, 공론화 필요성이 언급된 만큼 이번에는 잘 될 것이라 기대된다”며 “국보는 나라의 보물이다. 숫자의 상징성이라는 게 일반인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숭례문이 불에 탔을 때 국보 1호여서 국민이 더 아쉬워했던 것이며, 이왕이면 우리 자긍심을 살리기 위해서도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막상 국보 1호를 교체한다는 서명 운동이 일자, 엇갈린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숭례문 입구에서 20년간 주차장을 운영하고 있는 제일주차장 사장은 복원 후에 숭례문은 볼거리가 없어져서 “이게 다야?”하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관광객을 자주 본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정기적으로 수문장 교대식도 하며 관광지로 손색이 없었다”며 “새로 복원했다고 하지만 부실해서 문제가 되고 있고, 볼거리도 없고,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토로했다.

또 국보 70호 훈민정음과 국보 1호 숭례문을 교체하자는 의견에 대해 “숫자를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바꾸게 되면 홍보지도 다시 만들어야 하고, 그만큼 정부 차원의 홍보비용도 발생하게 될 것 아니냐”며 “국민이 혼란스러워 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부실 복원된 숭례문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구사한 일본인 관광객 우치다 다카히로(28, 남) 씨는 “훈민정음은 한국 사람에게 중요한 문화다. 훈민정음이 국보 1호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숭례문을 국보 1호로) 그대로 두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온라인 다음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서명 운동은 삽시간에 확산되고 있다. 청원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2만 명을 넘어섰다. 혜문스님은 “현재 다른 사이트(우문지, 한글과 컴퓨터, 우리말 지킴이 등)에서 청원하는 것을 포함하면 2만 5000명 정도가 넘는 인원이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돼 만든 해설서다. 책이름이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시작하는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으로 목판본 2권 2책이며, 목판본은 서울시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0호로 지정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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