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문헌으로 본 추어(鰍魚)요리

중국 고대 성인 공자(BC 551~479)의 ‘시경’에 “미꾸리를 식용으로 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작가가 산동성 란린 출신의 ‘흔흔자’라 불리는 ‘소소생’이라고도 하고 ‘이개선’이라고도 하는 자의 명나라 때 중국 소설 ‘금병매’를 보면 미꾸라지를 정력의 상징으로 그리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등장한다. 여기에는 영세민이 즐겨 먹는 9종의 수산동물이 열거돼 있는데 ‘추(鰍)’도 포함돼 있다.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신이행’ 등이 엮은 중국어 어휘사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묏그리’로, 1798년(정조 22) 이만영의 ‘재물보(才物譜)’와 순조 때의 실학자 유희의 ‘물명고(物名攷)’에는 ‘밋그라지’가 나온다.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1518~1593)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미꾸라지를 추어(鰍魚)라 했고, 맛이 달고 평(平)하며 독이 없는 식품으로 특히 양기가 위축됐을 때 먹으면 치료가 된다고 했다.

조선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 선생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1850년경)’ 권 28편을 보면 추두부탕 끓이는 방법이 나온다. 책에는 “물이 담겨 있는 솥 속에 두부를 여러 덩어리 잠기도록 늘어놓고 미꾸라지 50~60마리를 솥 물속에 풀어 놓는다. 솥 밑에서 불을 지피면 물이 뜨거워지면서 미꾸라지는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파고든다. 물이 끓을 때까지 계속 불을 피우면 미꾸라지는 익는다. 두부를 꺼내어 자르면 미꾸라지는 두부 속에 끼어있다. 탕으로 성균관 인근에 살던 반인(백정)들이 즐기던 이미(異味)”라고 했다.

원래 이 추두부탕은 초선두부인 ‘초선탕원’에서 유래됐다.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불리는 초선은 원래 동탁의 시녀로 하얀 두부가 초선의 백옥같이 흰 피부와 야들야들한 몸매를 상징하고 미꾸라지를 교활한 동탁을 비유해 뜨거운 국 안에서 추어가 놀라서 급한 나머지 차가운 두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만, 결국 그 요리 속에서 삶아져야 하는 운명을 비유한 중국 강서(江西)의 대표적인 두부 요리다. 베보자기를 깐 두부에 간수를 넣고 끓인 순두부를 붓고 이틀간 해감을 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넣으면 미꾸라지가 놀라 찬 두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순두부를 눌러 물을 짜낸 후 두부를 잘라 찜통에 쪄내는 것이다.

1610년 허준이 편찬한 한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추어’라 하고, 조선 후기 정조 때 실학자였던 서유구가 저술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의 전어지에서는 ‘이추’라 하고 한글로 ‘밋구리’라고 표기했다. “드렁허리와 비슷하나 짧고, 머리가 뾰족하고, 몸이 노랗고 검다, 분비된 점액이 몸을 싸고 있어서 미끄러워 붙잡기가 어렵고 하면서 시골사람들이 국을 끓여 먹는데 특이한 맛이다”라고 설명했다.

1924년 발행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추어탕 끓이는 법으로 “밋구리에 물을 치고 소금을 조금 치면 대단히 요동을 할 것이니 2분 동안만 두었다가 맹물을 두어 번 부어 해감을 해 토하도록 한 후에 맹물에 업진이나 사태가 녹도록 끓인 후에 고기는 꺼내고 식혀서 양밀가루를 걸쭉하게 풀고 두부를 갸름하고 납작하게 썰고 생강을 껍질을 벗겨 대강 다지고 고추씨를 빼고 다지고 파도 다지고 고비나 표고나 송이버섯을 굵게 찢어 넣고 곱창이나 양도 삶아 썰어 넣고 밀가루 푼 데 모두 넣어 휘저어가며 눋지 않게 끓거든 밋구리를 급히 쏟아 넣고 뚜껑을 얼른 닫았다가 다시 열라. 튀어나오며 죽는 것이 좋지 않느니라. 부드럽게 저어가며 밋구리가 다 익거든 계란을 몇 개든지 개여 풀고 떠내어 먹을 때 후춧가루와 계피가루를 치고 국수를 말아 먹으면 좋으니라”라고 소개돼 있다.

장국은 소의 가슴에 붙은 고기인 업진이나 사태를 팔팔 끓인 국이었다. 위의 조리법만 보아도 추탕의 맛이 기름지면서 걸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무렵에 추어탕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최영년이 1925년 출간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서리가 내릴 무렵 두부를 만들어 이것이 미처 응고되기 전에 추어를 넣고 다시 눌러서 굳게 해 얇게 썰고 생강, 천초를 넣고 가루를 섞어 삶는다”고 기록돼 있다.

1929년에 나온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는 “예전에는 선술집에서 하급 노동자들이 먹었던 추어탕이지만, 지금은 경제가 곤란한 까닭인지 계급사상의 타파인지 말쑥한 신사들도 먹는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다른 어종에 비해 미꾸라지 요리에 대한 문헌적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비록 문헌적 자료는 빈약하다 해도 전국에 걸쳐 미꾸라지가 분포돼 있으므로 도시나 농촌이나 할 것 없이 추어탕의 역사는 오래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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