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학자, 역사적 의미·가치 재평가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120년 전 1894년 충청과 호남 등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가 중심이 돼 일어난 우리나라의 첫 농민들의 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을 한국·중국·일본 학술연구자들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자리가 마련돼 관심을 끌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질서, 나아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천도교가 공동주최한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28일부터 29일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소강당)에서 개최됐다.

‘동학농민혁명, 평화·화해·상생의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는 한·중·일 석학들의 기조강연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의미’ ‘동아시아의 미래’라는 3개의 소주제로 진행됐다. 패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담고 있던 자유와 평등, 평화의 정신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첫 발제자로 나선 이이화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한마디로 요약해 기층민의 변혁운동이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첫 경우에 해당한다”며 “그들의 이념적 지향은 차별적 신분제도의 철폐, 독점적 토지제도의 혁파, 지배세력이 저지르는 비리의 척결, 주권을 유린한 외세를 몰아서 쫓아내고자 했다. 이는 종교조직인 동학과 체제를 바꾸려는 변혁세력이 연합해 수행됐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이사장은 “당시 한반도 대외정세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반봉건, 밖으로는 반침략·반외세를 지향한 자주의식을 분명히 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치쥔지에 전 중국갑오전쟁박물원장은 “파죽지세의 농민혁명은 비록 그 기간은 짧았으나 방대한 규모, 강한 전투력을 가졌고 부패하고 무능했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 정부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일본도 군사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됐다”며 “청나라는 갑오전쟁의 참패로 일본에 영토를 할양(다른 나라에 넘겨줌)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서방열강이 중국 영토를 분할하는 전주곡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승리한 일본은 침략을 통한 대외 확장의 경제적 효율성까지 확인했고 침략 확장의 욕망을 더욱 팽창시켰다”고 평가했다.

일본 이노우에 가츠오 훗카이도대 명예교수는 일본군이 자행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섬멸작전을 성찰하고 역사의식을 일깨웠다.

이노우에 교수는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은 1894년 10월 27일이었다. 라이플총을 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30만~5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며 “그럼에도 현재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1개 출판사만이 동학농민의 항일 봉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을 뿐 처절한 섬멸작전은 일본의 민중 속에서도 깊은 어둠에 파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은폐됐던 역사적 사실이 이제는 개방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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