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군인은 유사시에 목숨을 건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싸운다. 이래서 군인은 생활을 위한 범상한 직업인이라기보다는 신성한 이타적(利他的) 사명인(使命人)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군인에게는 저절로 국민의 신뢰와 존경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모을 만큼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군인들로 구성된 군은 강군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강군의 첫째 조건이다. 바로 우리 군대가 이런 신뢰받고 존경받는 강군이 돼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욕심을 갖는 것이다.
부러운 마음으로 읽은 기사 한토막이 있다. ‘앨버트 마를’ 미 육군 상사가 수많은 훈장이 부착된 제복을 엄숙히 차려입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깔끔한 제복과 훈장은 군인의 기강과 기개, 영예를 상징한다. 자리는 ‘이코노미(economy)’ 석이었다. 그는 제복과 훈장이 구겨질 것을 우려해 승무원에게 옷장에 보관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는 옷장은 일등석 손님을 위한 것이라며 그의 청을 거절하고 만다. 규정은 그런지 몰라도 영혼의 울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계적이고 냉혈적인 응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승객들, 심지어 일등석 손님들까지 가세해 그 승무원을 질책하고 나섰다. 한 일등석 승객은 국가를 위한 봉사에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옷장에 그의 옷을 대신 보관해주었다. 자리까지 양보한 승객도 있었지만 ‘마를’ 상사가 이를 정중히 거절한 것은 짐작할 수 있는 바와 일치한다. 바로 이렇게 특별한 사명인인 군인을 바라보고 대하는 이런 시각과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배경이 부럽다는 것이다. 이는 군이 바로 서고 건강하고 투명하게 본령에 충실할 수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하다. 그런 군을 가진 나라와 국민이 역시나 부럽다.
만약 우리가 ‘마를’ 상사의 경우처럼 일반 국민들 사이에 섞인 우리 군인이 그와 유사한 상황을 겪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마를’ 상사가 탄 비행기의 탑승객들처럼 반응할 수 있을까. 이를 각자가 조용히 양심에 물어 솔직한 대답을 구한다면 그 대답 속에 우리 군과 민, 사회의 정직한 자화상이 있다. 솔직히 ‘마를’ 상사가 탄 비행기의 탑승객들처럼 반응하겠다는 대답이 많았으면 하고 소망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 보인다.
어떻든 ‘마를’ 상사는 비행기 속에서의 우연한 해프닝으로 유명해졌을 뿐 무명에 가까운 일개 군인 중의 군인이었을 것임에도 ‘군중(群衆)’이 그를 위해 들고 일어난 것은 그가 속한 군이 역사적으로 쌓아온 국민의 신뢰와 존경 덕분이다. ‘마를’ 상사 개인을 보고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같은 군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들고 일어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군이 정치권력이나 탐하고 부패와 비리에 얼룩져 국민의 신망을 잃어버린 역사적인 악업을 갖고 있거나 현재도 그런 일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은 하루도 전쟁을 치루지 않는 날이 없는 세계 초강대국이다. 그 같은 전쟁 속에서 한 해 수백, 수천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는다. 그럼에도 전쟁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정치적인 다툼과 여론의 엇갈림은 있을지언정 전쟁에 부름을 받아 전장에 나가 희생을 감내하는 군인에 대해서만은 어느 편이거나 고귀하고 값진 것으로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낸다.
군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에 대비해 있는 특별한 존재다. 조국과 국민의 안전, 재산을 지켜내고 봉사하는 것이 본분이며 그 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초개처럼 버린다. 그런 군인의 이타적인 희생은 거룩하다. 그런데 전쟁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민간인인 정치지도자들이다. 군은 그 결정에 따를 뿐이다, 그 결정이 군인을 전쟁으로 불러내는 ‘조국의 부름’이 되는 것이다. 민간 우위의 원칙에 따라 최종적으로 민간의 지배를 받는, ‘바로 선’ 선진 군대에서 민간 지도자의 결정에 거역하는 항명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진정 훌륭한 군을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는 군을 육성하고 기르는 국가와 국민적 토양과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군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이 가르치는 것처럼 자신이 자신을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먼저 추동(推動)해 나아감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계급의 고하(高下) 간에 그럴 수 있고 그럴 줄 아는 군인이 많아야 강군이 된다. 이 역시 강군의 또 다른 조건이 될 성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작금에 연달아 터지는 군기 사고와 추문, 비리를 접하는 심사는 꽤나 불편하다. 언론 매체들이 쏟아내는 병영의 사건 사고들이 우리 군 전체의 진면목은 아니라고 믿지만 단 한 건의 그 같은 사건 사고라도 군의 신뢰를 깎아내리게 되는 것임은 더 강조할 것이 없다. 가끔 의식과 실천의 불일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국민의 의식은 세계 일류에 끼일 만하게 높아지고 반도체와 한류가 각각 상징하듯이 우리 경제와 문화 역시 세계를 주도한다. 우리 군도 이 같은 사회 전반의 흐름에 맞추어 전투나 의식, 병영 내외에서의 행동과 처신에서 세계 최고의 군을 지향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한편 국회의 국감장에서 터져 나오는 방산(防産) 비리는 결정적인 불신의 소재가 되고 있다. 국민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을 갖는다. 국민은 그동안 군이 자랑해온 우리 기술로 만든 각종 신형 첨단 무기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곧 우리 군에 대한 신뢰였고 안보에 대한 안심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문제가 없는 것이 없고 그것들을 발주하고 조달하는 과정에 비리의 곰팡이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참담한 심정을 뭘로 달래고 보상해줄 것이며 이런 형편에 우리 국방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강군을 가질 날이 언제일 것인지 걱정이다. 전시작전권 인수가 무기한 연기됐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 자명해진다. 강군은 비리로부터 자유스럽고 투명함으로써 당당할 수 있어야 이루어진다. 청렴성, 투명성 이 역시 중요한 강군의 조건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