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다소 서두르는 감까지 엿보이며 북한이 별안간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국제사회로 나가려는 노력이 좌절되자 일단 한반도 평화의 주역인 양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에서부터 당장 발등의 불인 국제사회의 인권공격과 한국의 전단을 막아보자는 노력도 그렇다. 또 11월 말경 예상되는 장거리 로켓 발사와 제4차 핵실험 등 초강경 모드로 갈 것인가, 아니면 먼저 대화무드를 조성해 대중의존도에서 벗어나 대남의존도로 생존을 유지하느냐 하는 사활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련의 북한 태도들은 남북대화의 끈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엿보이게 만들고 있다. 북한은 지난 15일 진행된 남북 군사당국자 접촉의 전말을 공개하면서 마치 끝장을 보려는 듯한 강경자세로 나왔다. 어렵게 마련된 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이 다시 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 사례와 비교할 때 완전히 남북 대화의 판이 깨지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 남쪽과의 회담 내용을 공개하고, 남쪽이 이를 반박하면서 진실게임에 들어가는 양상은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1년 6월 북한의 ‘베이징 남북 비밀접촉’ 내용의 공개다. 당시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남북 간 비밀접촉이 5월 9일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며 경위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의 사과를 놓고 오간 대화는 물론, 남쪽이 비밀 유지를 부탁하고 돈봉투를 내밀었다는 내용까지 폭로했다.

남북 접촉이 실패로 돌아간 뒤 북쪽이 접촉의 전말을 공개했다는 점에서 이번 군사접촉 공개와 닮았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 4년차로, 정상회담 물밑접촉을 2009년부터 2년가량 해오던 때였다. 오랜 접촉에도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북쪽은 임기 말이 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실제 북한은 비밀접촉을 공개하기 이틀 전에 국방위원회 성명을 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역적패당으로 부르며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사격훈련장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표적지로 쓴 데 대한 반발이자 이명박 정부와의 대화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아직 박근혜 정부와 김정은 정권은 출현한 지 2〜3년밖에 안 된 신생정부다. 따라서 남북관계 발전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서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이번에 북한은 남한 정부의 박근혜 대통령을 점잖게 호칭하면서 “지켜보겠다”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번 군사접촉 공개에서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을 ‘남조선 실권자’, 우리 정부를 ‘남조선 당국’으로 표현하는 등 상당히 정제된 표현을 썼다. 정부의 30일 2차 남북 고위급 접촉 제안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비록 북한은 “2차 고위급 접촉의 전도가 위태롭게 됐다”고 위협했지만,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남조선 당국의 차후 움직임을 주시하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번 군사접촉 공개가 남북관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난해 7월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실무회담 때와 비슷하다. 당시 북한은 제6차 실무회담 직후 북쪽 단장이 이례적으로 남쪽 기자들을 찾아와 남북 간 회담 내용을 상세히 공개했다. 이 일과 관련해 많은 전문가들이 “사실상 개성공단 정상화가 물 건너갔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청와대도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북한은 “남한은 모든 후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남북은 한 달여 뒤인 8월 중순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했다.

어차피 북과 남은 남북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를 실현하자는 단순논리다. 여기에서 일방적 양보와 상대방 논리에 대한 긍정은 금물이며, 그것을 양자는 ‘회담성과’로 빚어내고 있다. 우리 민족은 그렇게 하기를 정확히 69년째 이어오며 분단의 세월을 한탄하고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과격하며 그들의 주장은 억지로 일관되어 있다. 결국 우월한 우리가 그들을 이끌고 통일로 가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에게는 그런 아량과 전략이 부족한 것 같아 무척 아쉽다. 무수한 북한 및 통일전문가들의 갑론을박보다 따뜻한 가슴이 요청되는 시기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바야흐로 차가운 시험대 위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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