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만석군(萬石君)(2)

가난한 소년에서부터 한고조 유방의 심부름을 하면서 해제, 문제, 경제 황제를 차례로 섬기게 된 석분은 그 성실함과 근면함을 인정받아 태자 대부에까지 올랐다.

경제는 성실한 석분이 아까워 제후의 재상으로 보냈는데 아들 네 명이 모두 관위에 올라 녹봉이 1만석이었다. 경제가 그들 일가에게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영예가 쌓였다고 칭찬을 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석분을 만석군이라고 부르게 됐다.

경제 말년에 그는 은퇴했다. 그러나 상대부의 신분은 여전했기 때문에 사계절의 궁전 행사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참석했다. 수례가 궁궐 문을 지날 때는 반드시 내려서 허리를 약간 굽히고 걸었으며 천자의 밀이 눈에 띄면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다.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 관리가 된 자가 인사하러 와도 그는 상대가 아무리 지위가 낮을지라도 반드시 예복을 갖추고 만났으며 이름을 마구 부르는 일이 결코 없었다.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심하게 나무라기 전에 자신을 먼저 꾸짖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들이나 손자들은 자신이 서로 비판하여 연장자에게 잘못을 빌도록 부탁했다. 잘못을 마음속으로부터 뉘우쳤을 때 비로소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석분은 성인이 되어 갓을 쓴 아들이나 자손과 같이 있을 때에도 반드시 갓을 썼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딱딱하지도 않았다. 하인들도 이런 주인 밑에서 즐겁게 일하였지만 조심을 잊는 일이 없었다.
때때로 천자로부터 음식이 하사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마치 황제가 앞에 있는 것처럼 반드시 깊이 머리를 숙여 엎드려서 먹었다. 친척이나 친지 가운데 불행한 일이 있어서 상복을 입었을 때는 진심으로 슬픔을 나타냈다.

그와 같은 그의 태도를 아들이나 자손들도 본받아 만석군의 일족에 대한 평판은 다른 나라에도 자자했다. 꾸밈이 없이 진실한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유학자들까지도 이 만석군의 일가에게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건원 2년(기원전 139) 낭중령인 왕장이 학술상의 문제로 처벌됐다.

‘유자는 형식만 시끄러울 뿐 실제 내용은 없다. 거기에 비해 만석군의 일족은 말없이 실해하고 있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여태후는 석분의 큰아들 석건을 낭중령 후임에, 그리고 막내아들 경을 내사(수도의 장관)에 임명했다. 그 당시 석건은 머리가 백발이 됐으나 아버지 만석군은 아직 정정했다. 건은 낭중령이 된 뒤에도 5일마다 휴가를 얻어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가서 문안을 드리고는 했다.

인사가 끝나면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머슴을 시켜 아버지의 속옷을 가져오게 하고 직접 자기 손으로 빨아서 다시 그것을 머슴을 시켜 가져가게 했다. 이것이 늘 그가 하는 습관이었지만 아버지는 모르게 했다.

조정에서 낭중령으로서 건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들이 물러가게 한 다음 기탄없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과 자리를 같이했을 때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제의 마음에 들어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 만석군은 그 뒤 능리로 집을 옮겼다.

어느 날 내사 석경이 술에 취해 마을의 외문을 지날 때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만석군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석경은 부들부들 떨면서 매를 맞으려고 상반신을 벗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만석군은 용서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형 건을 비롯해서 가족 모두가 상반신을 벗고 사죄하는 소동을 벌였다.

“내사라면 대단한 지위다. 마을에 들어오면 장로들도 무서워서 도망간다. 그러면 내사는 장한 듯이 마차를 탄 채 거드름을 피우면서 지나간다 그 말이지, 그렇지?”

만석군은 그렇게 비꼬아 말하고는 간신히 아들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 뒤부터 아들들은 물론 그 가족 모두가 마을의 문을 들어서면 마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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