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 증보 교감 완역본 표지 (사진제공: 여해고전연구소)

초고본 누락·오독 바로잡고 체찰 부사 한효순 기록 밝혀
“급히 전선 만들라는 선조 명에 눈물 흘리며 밤낮 30척 지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에도 펜을 놓지 않고 전시 상황과 날씨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 난중일기, 앞서 1955년에 북한 학자 홍기문으로부터 최초로 번역된 ‘난중일기 한글번역본’이 있었다. 이 한글본을 발굴한 여해고전연구소 노승석 소장이 기존번역본과 비교하며 초고의 오류를 모두 바로잡고 이본을 정리한 최종완역판 ‘증보교감완역 난중일기’가 최근 출간됐다.

최초 한글번역본을 쓴 홍기문은 초고본을 보지 않고,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된 ‘충무공전서(신문관본과 통영본)’와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를 토대로 번역했다. 초고본으로 풀어야 할 누락과 오독 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다. 노 소장은 난중일기 해독상의 중요한 부분에 홍기문의 견해를 인용하거나 비교대상으로 참고했다.

지금까지 초고본을 중심으로 이본끼리 대조해 교감한 사례는 총 174건이다. 초고본 자체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해 교감한 사례는 91건, 전서본으로 교감한 사례는 29건(중복 7건), ‘난중일기초’로 교감한 사례는 3건, 일기초로 교감한 사례는 58건(보유 35건)이다.

▲ 난중일기 중 갑오년 11월 29일 원본 (사진제공: 여해고전연구소)

특히 이번 완역판에는 난중일기에 적힌 의문의 두 글자 ‘難逃(난도)’라는 글귀의 의미를 정확히 밝혔다. 제갈량이 촉한의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표문에 “정해진 운명은 피하기 어렵다(難逃定數)”고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노 소장은 이번 완역 연구 과정에서 정유년(1597) 군기와 전선 제조를 담당한 체찰 부사 한효순이 선조의 명을 받아 급히 전선(戰船)을 만들어 수군을 도운 사실도 처음 밝혀냈다.

이 내용은 한효순의 ‘월탄연보’에도 나온다. 기록에는 “급히 전선(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는 선조의 하교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밤낮으로 경영하여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서 전선을 만들어 연속 30여 척을 보냈다. 또한 군관들을 남쪽에 많이 보내어 피난민의 배 값을 조등(刁蹬, 농간을 부려 값을 뛰게 함)하는 자는 엄한 형벌로 금지시켰다”고 나와 있다.

노 소장은 명량대첩의 승리 요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하는 열세의 상황에서 부하를 군법으로 경고하고, 군공으로 사기를 진작케 해 부하를 독려했다. 지휘관이 솔선수범해 신의로써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승리를 이끌었다.

둘째,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임기응변. 협수로라는 울돌목을 교전 장소로 정하고, 조수의 급류를 이용해 수군의 전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했으며, 왜군의 병력을 무력화시켜 적을 신속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셋째, 지역민의 자발적 동참을 유도한 감화력. 이순신의 헌신적인 노력에 지역민들이 수군을 지원하고 의병활동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참했다. 피난선 수백 척을 동원해 13척 전선의 후방에서 전선으로 위장해 왜군의 기선을 제압했다. 책은 2만 5000원(도서출판 여해).

한편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안민석 의원은 “난중일기 총 8권 중 1권인 을미일기가 분실됐다”면서 “문화재청은 이 사실을 언제부터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동안 을미일기를 되찾기 위해 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1795년 정조 때 처음 활자로 찍어낸 ‘난중일기’ 8권은 문중에서 보관, 관리해 왔으나 그중 1권인 ‘을미일기’가 어느 날 갑자기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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