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불과 1주일 사이 남과 북은 통일과 분단의 냉엄한 현실을 또 한 차례 차갑게 공부했다. 북한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일행이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통일열차는 순항하는 듯 했지만 그로부터 1주일 뒤 북으로 날아간 삐라와 남으로 날아온 총성은 순식간에 통일열차를 멈추어 세웠다. 삐라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글이 인쇄된 종이장에 불과하다. 또 거기에 들어있는 1달러짜리 지폐가 무엇인가? 그것은 여기 서울에서는 담배 한 갑도 사기 어려운 작은 돈, 역시 종이장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북한은 거기에 대고 14.5미리 고사기관총을 쏘아댔다. 북한군의 고사기관총은 비행기나 탱크를 겨냥하는 중무기다. 날아온 총탄을 보니 탱크에 퍼붓는 철갑탄이었다. 작심하고 쏜 것이었다. 휴전선에서의 기관총 발사는 적어도 북한군의 군령권자인 총참모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 군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면서 전투태세에 돌입해 북한의 도발행위에 경고했다. 북한군의 고사기관총 발사는 불과 10발 미만으로 이는 시늉만 한 것일 뿐 더 큰 확전은 원치 않는다는 시그널이다.

아마도 북한군은 이번에 ‘과잉충성’ 내지는 ‘밥값’을 위해 고사기관총을 발사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건강과 심기가 불편한 김정은 최고사령관을 위해 뭔가 위로성 ‘충성의 보고’가 필요한 북한군이 우리의 ‘응징’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포도 아닌 기관총을 몇 방 날린 것이다. 삐라의 원점만 조준했을 뿐 지휘세력 공격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장기인 ‘입’을 동원했다.

북한은 탈북자단체의 전단 살포를 비난하며 남북이 합의한 제2차 고위급접촉이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이 됐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11일 ‘삐라살포 망동의 조종자는 누구인가’란 제목의 논평에서 탈북자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는 “우리에 대한 용납 못할 정치적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우리 총정치국장 일행의 인천 방문으로 모처럼 마련되고 있는 북남관계 개선의 분위기를 가로막아보려는 단말마적 발악”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특히 “이번 사태는 삐라 살포 광란이 불과 불이 오가는 열전으로 번져갈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경고했다. 통신은 “남조선 당국의 무책임하고 도전적인 처사로 북남관계가 파국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특히 북남 사이에 예정된 제2차 고위급접촉도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북남관계 개선과 대화를 바란다면 마땅히 우리의 경종을 심중히 받아들이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삐라 살포를 오히려 묵인·두둔했다”고 주장했다. 계속해 조선중앙통신은 “앞으로 북남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렸다”고 강조해 남북관계 개선의 여지는 남겼다.

어쩐지 이번 북한의 표현은 그 특유의 나약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인 여백을 거듭 강조하는 면도 특징적이다. 한마디로 제발 남측 정부가 삐라 살포를 말려달라는 구걸 같다. 2014년 하반기 북한의 대남정책은 강성의 지속이냐, 아니면 유화로의 전환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북한은 이번 기회를 놓칠 경우 장거리 로켓(ICBM)발사와 제4차 핵실험이란 모험주의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북남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황병서 등 빅 쓰리까지 전용기에 태워 내려 보냈다. 자유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이지만 적어도 탈북자 단체들은 10월 말 남북고위급회담까지는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국민들의 바람이었다. 또 소리 소문 없이 삐라를 날려보냈더라면 북한은 저렇게까지 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단 지상주의자와 그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전단 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은 곰의 굴에 연기를 들여보내 사냥하겠다는 것이며 그 반대론자들은 일단 굴 밖으로 끌어내 놓고 보자는 것이어서 방법만 다를 뿐 목표는 일치한 것이다. 삐라도, 총성도 모두 통일열차에 실어야 할 ‘운명의 화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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