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산군 성불산 (사진제공: 괴산군청)

직지 편찬 고려 법운화상 발자취 따라

[글 이재준 (대기자, 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사진 박준성] ‘무심(無心)’은 반야(般若)의 진리라고 했다.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마저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불자들이 암송하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섭리를 담고 있다. 보이고, 느끼고, 맛보는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공(空)’이라고 정의한다.

흰 구름은 하늘에 떠 있다 홀연히 사라진다. 사람의 운명도 흡사 구름 같은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640여 년 전 고려 말의 큰 스님 백운화상(白雲和尙)은 평생 ‘무(無)’의 진리에 침잠, 선문을 오가다 흰 구름처럼 가신 고승이다. 그래서 ‘백운’이란 호를 얻었다. 스님은 경한(景閑)이란 법명으로 불리었으나 ‘무심스님’이란 별명이 더 어울릴 듯하다.

스님이 지은 ‘무심가’를 들어 보자.

깨끗한 뜬구름은 허공에 일었다 사라지고
잔잔히 흐르는 물은
동쪽의 큰 바다 한복판으로 흐른다.
물은 굽은 곳이나 곧은 곳을 흘러도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구름은 스스로 뭉치고 스스로 흩어져도
친함도 소원함도 없네.

만물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나는 푸르거나 누렇다고 말하지 않네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마음을 내는구나.

경계에 부딪혀도 마음이 구름이나 물 같으면
세상에 살더라도 무슨 거리낌이 있으랴
사람마음에 억지로 이름 짓지 않으면
좋고 나쁨이 무얼 좇아 일어나리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버리되 마음은 비우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비우되 경계는 버리지 않네.

마음을 비우면 경계는 저절로 고요해지고
경계가 고요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여여(如如)해지리니
이것을 무심진종이라 하느니라.

스님은 만년에 성불사(成佛寺)에 정처하며 팔만대장경의 경구가 될 만한 아름다운 가르침과 수많은 고승들의 언행을 모은 불서를 엮었다. 이름 하여 직지심체요절.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글을 줄여 ‘직지’라 한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스님이 성불한 성불사는 지금 정확히 확인된 곳이 없다. 스님의 시호 백운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불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스님은 성불사에서 직지를 편찬하고 경기도 여주 취암사로 거처를 옮긴다. 스님이 왜 취암사로 간 것일까. 방랑의 벽인가 그 무엇을 찾으려 한 것인가.

스님은 취암사에 의탁한 지 2년 후 홀연히 입적하신다. 스님이 마지막 향화를 올렸다는 취암사도 지금은 흔적이 없다. 허허로운 절터에는 이름 없는 잡초만 가득 자라 있다.

인류 최고의 정신 유산이며 혼탁한 이 세상을 구할 값진 유물로 평가되는 직지. 이 불서가 유명해진 것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데 있다. 현존하는 금속인쇄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금속활자로 직지를 찍은 곳은 청주 무심천변인 고려시대 절 흥덕사(興德寺)다. 스님이 입적하신 2년 후 제자들은 비구니 묘덕스님의 출재로 직지를 찍어낸다. 왜 묘덕스님이 스폰서가 된 것일까.

묘덕의 정체는 누구이며 하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것인가.

무심천은 옛 신라 서원경의 고지 청주의 젖줄로서 주변에는 많은 불교유적이 있다. 사직동에 남아있는 용화사, 그리고 운천동 일대와 흥덕사 유적은 그 대표적이다. 흥덕사는 청주읍성에서 조금은 떨어진 외곽지대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직지 간행기에도 ‘청주목외(淸州牧 外) 흥덕사 운운’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묘덕은 당시 흥덕사의 주지로 상정된다. 그녀는 왜 많은 사재를 투입하여 백운스님의 저서를 정성스럽게 출판한 것인가. 몇 년 전 청주에서 공연된 직지 오페라는 스님과 묘덕을 이룰 수 없는 연인으로 그린 바 있다. 과연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까. 이를 정확히 답변해줄 증거는 없다. 다만 그럴 것이라고 유추한 픽션에 불과하다.

이 픽션은 오페라로 공연됐으나 직지라는 성보를 탄생시킨 뜻을 폄하했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도했다. 일부 학자들이 묘덕을 고려 후기 정안군(靖安君?.고려왕실)과 관련 지어 생각하고 있으나 정확하지가 않다.

▲ 성불산 성불사지 ⓒ천지일보(뉴스천지)

괴산 성불산 성불사터를 가다
성불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감물면 오성리와 괴산읍 기곡리 사이에 위치하는 고도 530m의 산이다. 산의 서쪽으로는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청천을 휘감아 내려온 달천(達川)이 흐르고 있다. 달천은 달래강이라 하며 바로 한강으로 통하는 물길이다.

▲ 18세기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괴산)의 성불산 표기

괴산에 있는 명산 35곳 중의 하나인 성불산은 이 산에 부처를 닮은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성불사(成佛寺)터는 이 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남아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 성불산이란 표기가 보인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경기도 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인문 정보를 포함한 전국의 지명(地名)과 지지(地誌) 사항을 작성한 자료 조선지지자료에서도 같은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진전쟁 이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 조에는 성불산이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음이 나타난다. ‘의상암은 원성산에, 성불사는 송명산(松明山)에 있는데 송명산은 군동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군남쪽 26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작은 우물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과거 괴산군 동헌에서 동쪽으로 12리면 바로 지금의 성불산을 지칭하는 거리다.

성불산은 본래 송명산으로도 불리던 것이 고찰(古刹) 성불사의 유명세에 힘입어 성불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후에 여러 기록으로 성불산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불사터는 성불산 정상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후기 사암은 비교적 높은 산에 자리 잡는 것이 상례인데 성불사도 이런 유행을 따랐던 것 같다.

절터를 가려면 괴강 제월대를 지나 이탄(梨灘)에서 오르는 길이 완만하다. 약 30여 년 전에 지은 성불사(주지.淸潭)를 지나 계곡으로 오르니 옛 길이 나타난다. 수백 년간 이 길을 스님들은 오르고 내리고 했을 게다.

한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니 제법 평평한 대지가 나타난다. 잡초로 뒤덮였지만 옛 건물이 자리 잡은 것을 상정해 보면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다. 절터를 안내한 괴산군청 문화관광과 양희근 담당관은 이곳이 성불사지라고 알려준다. 그는 지난 8월 말에도 절터를 확인하기 위해 답사했다고 한다.

▲ 성불사지터에 세워져 있는 선돌 민간신앙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 ⓒ천지일보(뉴스천지)
▲ 성불산 성불사지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후기~조선시대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 ⓒ천지일보(뉴스천지)

건물지는 서북망(西北望)한 층단(層段)의 대지 위에 확인된다. 그 중 중앙의 제일 넓은 대지에 법당을 짓고 그 주변으로 여러 채의 요사채를 조성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산신당지로 보이는 대지에는 오래된 선돌 두 기가 자리 잡는다. 흡사 미륵 부처를 생각게 하는데 민간신앙의 경배대상이었던 것 같다.

건물지 아래에서 여러 점의 고와편(古瓦片)이 수습되고 있으며 그 와편은 고려말~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와편을 미루어 보아 근세까지 향화가 올려 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에서 내려다보니 북서쪽 괴강 일대의 가을 들녘과 한참 조성 중인 산업단지 공사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문기관에서 발굴을 한다면 성불사의 가람배치와 역사를 규명할 수 있을 게다. 성불사지는 과연 어떤 역사적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줄까.

직지가 태어난 성불산 성불사의 위치 착오
고려 말 직지가 엮어진 성적(聖跡) 성불사에 대해서는 충북 괴산, 경북 영천과 대구, 황해도 황주와 해주, 평산, 함북 길주 등이 문헌에 나와 그 위치를 두고 분분하다. 그동안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에 있는 정방산(해발 480m, 전 이름은 성불산으로 불렸다 함)에 위치한 성불사가 바로 백운화상이 직지를 편집한 곳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한 연구가는 “목판본 직지와 백운화상어록의 서문을 함께 작성한 목은 이색(李穡)의 시집인 ‘목은시고’ 중 ‘용두의 대선(大選)이 황주에 가서 새로 절을 얻었다고 말하다’라는 시에서 ‘성불산 안에는 옛 절들이 많기도 한데’라고 읊은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황해북도 사리원시 성광리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는 898년(신라 효공왕 2)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은 정방산(正方山)이 ‘진호(鎭護)의 땅’이어서 이곳에 성불사라는 절을 짓고 승려들의 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사찰령(寺刹令) 반포 때 본산의 하나로 꼽혔다. 현재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5층석탑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직지를 엮은 백운화상이 만년에 거처한 성불사였을까. 스님은 성품이 크고 번잡한 곳을 싫어하신 분이었다. 정처하는 곳이 모두 작은 암자이거나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공민왕 6년(1357) 스님은 공민왕으로부터 입궐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스님은 아직 최상의 법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꺾인 병든 나무에 자신을 비유’하는 선시(禪詩)를 지어 보내며 사양했다. 스님은 이 시기에도 전국을 돌며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8년 후인 공민왕 14년(1365) 6월 21일에는 왕명을 받고 할 수 없이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두 달 뒤에 공민왕에게 사퇴를 간곡히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4년 후 공민왕 18년(1369) 72세 때에는 경기도 김포 망산(望山)에 위치한 고산암(孤山菴. 김포시 고산 추정)에서 머물렀다. 이 곳도 사찰이라기보다 산속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다.

그 이듬해인 공민왕 19년(1370) 스님은 왕이 친림한 가운데 납자들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할 때 시험관으로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스님은 국가적인 행사였던 공부선을 마친 4년 후인 공민왕 23년(1374)에 경기도 여주 혜목산 취암사(慧目山 鷲岩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여기서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스님의 마지막 4년간의 행적이다. 스님은 이 기간 어디서 참선하며 불후의 명작 직지를 찬술한 것일까.

직지 발문(跋文) 3에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 나온다. 스님이 법린(法隣)선인의 정성스런 도움으로 직지를 엮으면서 쓴 기록이다. 여기에는 스님의 나이 75세인 ‘임자년 9월 성불산에서 노비구 경한백운수서(歲在壬子年九月 成佛山居 老比丘 景閑白雲手書)’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스님이 입적하기 2년 전 직지가 완성되었으며 그 제작이 성불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스님이 왕경인 개경이 가까운 해주나 김포등 사암이 아니고 비교적 먼 거리인 지역의 사암에서 제자들과 직지를 완성했음이 상정되는 것이다.

스님이 입적한 취암사에서도 제자 법린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가 발간 된 2년 후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도 법린의 주도로 목판본 직지 간행이 이루어진다. 이 해가 우왕(禑王)4년(1378). 제자(弟子)인 법린과 흥덕사(興德寺)의 주자본(鑄字本) 인출 때 시주자였던 비구니 묘덕(妙德) 등이 참여했으며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김계생(金繼生) 등이 새로운 시주자(施主者)로 나섰다.

금속활자에서 썼던 성사달(成士達) 서문(序文)에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목은 이색(李穡)의 서문(序文)을 새로 덧붙여 펴낸 것이다. 이 목판본 글씨는 일암, 선화(禪和), 천선 등이 썼고 종건(宗乾), 참, (창(昌))여(如), 신명(信命) 등이 각수(刻手)로 참여하였다고 기록된다.

스님의 정처 없는 방황 성불사에 머물다
왕명을 피해 해주에서 도망치듯 나온 스님은 제자 법린, 석찬(釋瓚)과 함께 김포 망산 고산암에 거주하다 다시 남하하여 괴산 성불산에 머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제자 법린이 있는 여주 취암사를 뱃길로 왕복한 것은 아닌지. 취암사는 성불산에서 달천 뱃길로 멀지 않은 거리이다.

현재 충주박물관에 소장된 성불사 석조보살좌상은 조사결과 괴산 불정면 전(傳) 성불사지에서 옮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불정면 성불사지도 이곳 성불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괴산군청 문화담당자에 따르면 이 불상은 성불사지에 방치돼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의 기증으로 수 십년 전에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머리에는 크고 긴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정면에는 작은 화불의 조각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다. 상호는 원만하며 자비가 넘친다. 좌불상의 가슴에는 화려한 경식(頸飾)이 조각돼 있어 보살상의 예를 따르고 있다. 좌수는 무릎에 상장(上掌)하였는데 본래는 정병(淨甁)이 놓여 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불상은 조각기법이나 원만한 상호(相好)등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 이후의 소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의 확인으로 미루어 불정면 성불사지도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

스님은 괴산에서 한나절 거리인 흥덕사도 왕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무심천(無心川)이란 이름은 스님이 흥덕사에서 무심을 설하며 머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흥덕사 묘덕스님은 스님의 제자가 되어 직지에 대한 열망으로 후에 모든 사재를 들여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출간하였을 것이다.

인류최고의 문화유산 직지탄생의 성지 정화를
괴산 성불산 성불사지(址)는 앞으로 발굴 등 학적 조사가 필요하다. 사역의 규모를 밝히고 유물을 찾아 역사적 의문을 규명해야 한다. 이곳이 법운화상이 제자 법린, 석찬 등을 데리고 직지를 편찬한 성지로 밝혀진다면 국가의 중요 사적으로 지정 보존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청주 흥덕사와 더불어 정신적 교육의 도량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충북도내 많은 절터를 조사 발굴해온 충청대학교 박물관장 장준식(불교미술) 박사도 필자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 임각수 괴산군수가 성불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괴산군은 아름다운 산수와 청정한 수변 공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명군(名郡)이다. 첫 국가중요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화양구곡을 위시한 산막이 옛길, 각연사, 외사리 사지, 만동묘 등 숱한 사적과 명승을 지니고 있다. 괴산 산막이 옛길에는 연간 140만 명이 힐링을 하고자 다녀간다.

괴산군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건강을 장담하는 유기농의 메카이다. 2015 세계유기농엑스포가 괴산에서 열리는 것도 바로 이런 괴산의 장점이 인정받은 것이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괴산 임각수 군수의 고향사랑, 고향발전의 열정에서 비롯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 군수는 직지가 태어난 성불사가 괴산 성불산이길 기대하며 올해는 이를 고증하는 여러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 최근에 지어진 성불사 입구 ⓒ천지일보(뉴스천지)

[본 기사는 월간 글마루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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