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종교현실이 왜 이런 지경이 됐을까. 한국은 경제는 성장해 있을지 몰라도, 정치·종교·언론에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종교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언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며칠 전 한국교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니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의 대표를 선출하는 데도 10억을 주면 당선되고 5억을 주면 떨어진다는 소위 ‘십당오락’은 이미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한국교회의 대표 지도자로 손꼽히는 조용기 목사와 관련된 비리는 성직자로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음은 신앙인을 떠나 온 국민도 다 아는 바다.

이번 사건은 자칭 반공(反共)을 교시로 삼는 것을 자부하며, 한국 대형교회의 상징이자 우상으로 자리매김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에 관련된 얘기다. 경서의 말씀을 도(道)라 했으니 신앙은 말씀을 길로 삼아야 하거늘, 왜 신앙을 말씀이 아닌 반공과 결부시키며 또 자랑거리로 삼는지 의문의 대상이었던 지도자다. 아마 그 시절 경서를 모르니 시대적 관심사로 교인들을 인도하며 부흥시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찌됐든 죄명은 ‘사기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 되는 사건으로서,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성직자로서는 파렴치 행위에 해당한다. 이 같은 부정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찌 한국교회뿐이겠는가. 한국교회는 물론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환부며 종교말세에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로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

이들이 들고 다니는 경서에는 분명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기록돼 있다. 그 말씀이 자신들을 향해 하신 말씀인 줄은 알고 있을까. 이천 년 전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지도자들이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삯을 위해 일하다가 심판받은 일은 또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지도자를 따르는 일반 신앙인들이다. 그들은 과연 이 같은 종교현실에 대해 얼마나 분별력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경서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경고해 놨다. 인도하는 소경은 어차피 소경이니 그렇다 치자. 따르는 자는 왜 소경을 따르는 것일까. 따르는 자 역시 소경이기 때문이며, 소경이기에 소경의 인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신앙적 이치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적어도 소경된 자의 인도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따르는 자 역시 소경이기에 소경의 인도를 받게 되고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는 신세가 된다. 그 경고대로 오늘날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코미디프로 같은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이 시대는 신앙인들에게 종교말세 현상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이고 알리고 있건만, 이 시대는 소경이 되어 보지 못하고 오로지 소경된 인도자를 좋게만 여기고 있으니, 아프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경서 곳곳에 “사랑하는 자를 책망한다”고 알리고 있지만, 저들은 오히려 책망과 경고를 욕으로 여길 뿐 깨닫고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

소경을 맹인(盲人)이라 했고, 맹인을 파자하면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며, 눈이 망했으니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세상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다. 모르면 보지 못한다는 얘기며, 보지 못하니 소경이다. 이 말까지 못 알아듣는다면 이번엔 귀머거리가 된다. 말소리는 들리나 말의 본질과 의미, 나아가 참 뜻을 헤아려 듣지 못하니 마치 귀머거리와 같다는 얘기다. 이는 실제 소경과 귀머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깨닫는 감각이 없어 천지 즉, 하늘과 땅을 분별 못하는 무식하고 무지한 자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무엇에 대한 무식과 무지이길래 이천 년 전에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어도 영접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오직 모세의 오경이 담긴 율법만을 고집했지, 하나님이 구약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약속은 알지 못했으니 바로 무지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빌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하시며, 미리 무지로 인해 심판받을 것을 예언해 놨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이 그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은 “마지막 때가 노아 때, 롯 때, 초림 때와 같다”고 했기 때문일까. 구약을 이룬 초림 예수의 복음은 알았지만, 그 복음 안에 씨 뿌린 밭에서 추수해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겠다는 또 다른 약속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오늘날의 무지다.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얘기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다 하는 사람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종교는 신(神)과 맺은 약속을 믿는 신앙이다. 약속한 바를 깨달아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소망삼아 가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약속이 없으면 경서가 아니며, 경서가 아니거나 경서가 없으면 종교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 고담에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이 있다. 즉,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 말은 ‘경(經)’이라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세상 말이 아닌 하늘의 말, 곧 하늘의 뜻이 담긴 경서(經書)를 일컫는다.

하늘의 소리, 곧 하늘의 뜻을 전할 때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본성대로 행하는 자를 짐승(牛)에 비유했으며, 오늘날이 바로 소경과 귀머거리들이 살아가기에 딱 좋은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지구촌엔 종교인·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쩌나, 바로 그들이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결어(結語)를 함에 있어, 특정인물과 특정종교의 허물을 드러내고 또 비방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알리지 않는다면 어찌 들을 수 있겠으며, 듣지 못하는데 어찌 깨달아 분별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와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거짓됨과 허물과 치부가 드러남으로 인해, 따르는 자들이 돌아설까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을 잃고 정치 권력화되고 돈을 쫓는 종교말세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나와야 한다. 오직 살 길은 그것뿐이다.

이천 년 전, 예수도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했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했다.

어차피 귀 있는 자만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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