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문화배우 겸 트로트가수 방대한 ⓒ천지일보(뉴스천지)

타국에서 힘든 노동에 실의 빠지기도
우연한 계기로 인생역전… ‘가수의 삶’

[천지일보=배성주 기자]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외국인 노래자랑 추석맞이 행사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최우수상을 받아 나름대로 인생 역전 한 방대한(본명 칸 모하마드 아사두즈만, 39) 씨.

방글라데시의 작은 도시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고생시키지 않겠다며 로스쿨에 진학하지 않았다. 1996년 5월, 둘째 형을 따라 한국에 들어와 형이 있는 안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1400~1600도(℃)까지 올라가는 열처리 공장에서 주·야간으로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다른 일로 바꿔달라고 하소연도 했다. 형은 그럴 바에야 다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생각 끝에 다시 열심히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다른 작업장으로 옮겨 한국인과 같이 일하게 됐다. 처음엔 한국말을 하나도 몰라 답답했지만, 동료들과 부딪히면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문화와 음식도 알게 됐는데 특히 김치, 마늘 냄새가 적응이 안 돼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매운탕이라고 한다.

그렇게 2년 동안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으나,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자 공장에서는 나가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형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한국에 남아 있고 싶었다. 식대비만 받고 일하겠으니 남게 해달라고 사장님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일했고, 몇 년 후 공장이 활기를 되찾았다.

안산 외국인 노래자랑 추석맞이 행사에 참가했다가 최우수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KBS 토요노래자랑 대회에 한국인 친구와 함께 출연해 3연승까지 하고, 전국노래자랑대회에 참가해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그리고 영화 출연까지 하게 됐다.

이젠 길을 지나가면 그를 먼저 알아보고 악수를 청한다고 한다. “가진 것 없지 만 늘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방대한 씨를 경기도 화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봤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외국인 최초로 대상을 받으며 유명세를 탔는데 당시 소감은.
출연자들의 노래 경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조용히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상 발표만 남겨 두고 있을 때 MC 송해 선생님이 ‘오늘은 국제무대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내가 외국인이니까 나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이어 ‘칸 씨 대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라 정말 기뻤다.

-많은 노래 장르 중에서도 트로트를 부르는 이유는.
공장에서 야간 일을 할 때 힘들고 외로웠다. 우연히 트로트를 듣게 됐는데 신나고 힘이 났다. 행사장에 가서도 무조건 트로트를 불러야 관객과 공감이 된다.

-싱글앨범 발매를 곧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
작년 말 가수 박상철 씨가 ‘비빔밥’이라는 곡을 선물해줬다. 박상철 씨가 곡을 주면서 ‘우리나라에 외국인 150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서 ‘너한테 딱 맞는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나도 한국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내 이름으로 된 노래가 한 곡 정도 있었으면…’하고 생각했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트로트 가수가 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선택했다.

-대상 수상 후 영화에도 첫 출연했는데.
노래는 자신 있었지만 연기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서울에 면접을 보러 올라갔다.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또 불러달라고 했다. 이틀 뒤에 캐스팅 연락이 왔다. 그런데 대본 리딩을 하는 자리에서 연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책 읽듯이 내려갔다. 감독님이 따로 불러내서 ‘이렇게 연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때 아버지가 떠올라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1주일 동안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후 거의 NG 없이 촬영을 마쳤다.

-영화 촬영 중 힘든 일은 없었나.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도 생기는 법. 촬영 중에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은 잠깐 휴가를 내서 아버지를 보러 오라고 했다. 출발 전에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께서 주무신다고 바꿔주지 않았다. 고향 집 앞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하얀 옷을 입고 계셨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남편이 사망하면 무조건 하얀 옷을 입는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이 말을 하는 그의 크고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는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영화를 마무리했고 다행히도 영화 ‘방가방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덕분이다.

▲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방대한이 촬영했던 영화 ‘방가방가’ 스틸컷. (사진제공: 시너지)

-자신을 다문화배우 겸 트로트가수라고 소개하는데 어떤 분야가 더 매력 있는가.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한테 더 많은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고, 배우로서 연기도 계속하고 싶다. 그리고 일도 하고 있다. 현재 (행사) 수입이 많지 않아 행사가 없는 날에는 일당 8만 원의 (막노동) 일을 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행복하게 사는 내 이야기를 많은 학생 앞에서 강의하고 싶다.

-한국인의 장점과 한국 생활의 어려운 점은.
없다. 한국은 다 좋다. 한국인의 ‘정’ ‘약속 지키는 것’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3가지가 가장 좋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살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방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더 행복하고 소통하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겠다. 사람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노래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는 “돈으로는 살 수 없고, 마음으로 사는 행복”이라며 해맑은 미소로 거듭 감사함을 표했다.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갈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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