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조선 정조 임금은 담배 연기를 아주 싫어했었다는 얘기가 있다. 솔직히 진실은 잘 모른다. 어느 날 정조 임금이 대신들이 기다리는 어전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날따라 대신들이 마구 빨아들이고 뿜어낸 매캐한 담배 연기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그 연기에 임금이 역겨움을 느꼈는지 정조는 “앞으로는 짐(朕) 앞에서 절대로 담배를 태우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 뒤로부터 위아래 맞담배가 자연스럽던 풍습이 사라지고 어른 앞에서 담배 피는 것이 금기시 됐다던가.

일설(一說)에 따르면 이렇게 조정 대신들까지도 즐겨 피던 담배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일본 사람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돼 있다. 우리보다 문호 개방이 빨랐던 일본은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그 담배를 전래받았다. 그 스페인은 해양모험가이며 그들이 안 가본 미답(未踏)의 땅에서 금은보화를 강탈해 일확천금을 꿈꾸던 해적과 다름없었던 콜럼버스에 의해 담배를 입수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 인디언들이 피는 담배가 몸에 좋은 신기한 약초인 줄로만 알고 스페인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 담배를 콜럼버스가 왕에게 바쳐 피우게 함으로써 전 유럽 대륙으로 흡연문화가 급속히 퍼져나갔다. 급기야는 전 세계로 확산되게 됐다. 지금은 담배가 몸에 몹시 해로운 물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담배가 기호물건임과 동시에 소화 촉진이나 충치 예방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가 그리 먼 옛날 얘기가 아니다.

하여튼 세상은 무척이나 변했다. 흡연의 유해설이 과학적 정설로 굳어져가면서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차별과 격리(Segregation)는 미국이나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한창일 때 백인과 흑인의 차별 대우를 연상케 할 정도다. 길거리에서,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음식점에서, 기차 역사, 버스 터미널, 공항, 공원, 거의 모든 빌딩에서 흡연자는 설 땅이 없다. 심지어 사적 공간인 가정에서도 흡연하는 식구는 환영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흡연자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왕따(Ostracism)의 처지로 몰리고 있는 형편이다. 마치 신분제 사회에서의 불가촉인(不可觸人)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심한 생각도 든다.

다중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이나 건물에는 어김없이 흡연자의 흡연행위를 격리하는 흡연실이 따로 있다. 그런데 그 흡연실이라는 것이 그 흡연실을 거느린 번듯한 첨단 건물에 비하면 가축우리만도 못하다고 느껴진다. 더구나 흡연실을 이용하는 흡연자가 많을 때는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비좁다. 이렇게 장소가 비좁은 탓에 굴뚝처럼 연기가 자욱해 정조 임금이 아니라 흡연자마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곳에서 손자 손녀 같은 젊은이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들이 서로 얼굴에 푹푹 연기를 품어대며 담배를 피워대는 풍경은 참으로 가관이다. 이런 곳에서의 흡연질서는 자신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 정조 임금 이전의 위아래 없는 무질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공기 좋은 툭 터진 공간에서 피우다가는 담배 값도 아까운 처지에 과태료까지 물어야 할 뿐만 아니라 흡연자를 불가촉인처럼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을 참아내야 하지 않는가. 흡연이 유해하다고는 하지만 흡연이 엄연히 합법인 세상에서 흡연자에 대한 이 같은 사회적 왕따 대접은 명백한 인권유린이 아닌가. 이에 흡연자들이 불만을 안 가질 턱은 없지만 그들이 조용한 것은 비흡연자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흡연이 합법인 이상 흡연자의 건강과 인권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만약 그런 조치를 할 수 없다면 담배와 흡연을 아예 불법으로 규정하고 못 만들고 못 팔게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가축우리만도 못한 곳에 흡연자를 격리해놓고 건강을 해치든지 말든지, 유쾌해하든지 불쾌해하든지, 그것이 싫으면 담배를 끊든지 말든지 하라는 식이면 공정하고 책임 있는 처사가 아니다. 금연 캠페인은 금연 캠페인대로 필요하며 비흡연자의 간접피해를 막을 대책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흡연자를 죄인 취급하는 것은 사리를 따지거나 실정법을 들먹이더라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흡연이 좋다거나 권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웃기는 것은 담뱃값 올리는 명분을 흡연인구를 줄임으로써 국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듯한 언변이다. 담뱃값은 서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른 물건에 비해 지금도 결코 싼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의 배로 올린다나 어쩐다나. 담뱃값을 그렇게 올리면 확실히 정부 재정 수입은 많이 늘어날지 모른다. 그런데 담배는 그 값이 싸고 비싸서 더 피우고 덜 피우는 것이 아니다. 강한 중독성 때문에 끊지 못하고 피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흡연자에게는 엉뚱한 핑계로 무담만 더욱 무겁게 지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흡연자도 국민이다. 더구나 대부분이 서민이다. 그럼에도 책상머리에 앉아 국민 부담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숫자 놀음하는 관행이 되풀이되는 듯한 모습을 보는 국민은 화난다. 만일 담뱃값을 꼭 올려야 재정이 채워질 것 같으면 정직하게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선행돼야 마땅하지 않은가.

비흡연 국민의 건강을 간접흡연 피해로부터 지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흡연이 합법인 이상 금연 캠페인과 금연 계몽을 통해 흡연인구를 줄여 나가면서 흡연하는 사람들의 건강은 건강대로, 인권은 인권대로 똑같이 지켜주는 것이 공평하고 정상적인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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