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종교는 이상주의의 완결판이다. 이상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상가는 결국 신비주의적 종교에 의지한다. 종교는 현실의 좌절이 반영될 때 비로소 강한 생명력을 확보한다. 전쟁과 같은 인위적 수단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물질적, 정신적 영화를 쟁취할 수 있다면 과연 내세의 천국이 필요하겠는가? 따라서 인격신의 절대적 권위에 의존하는 종교가 발달하는 배경에는 대체로 약소민족 또는 국가가 있다. 유럽에서 오리엔트라고 부른 오늘날 중동지방에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둔 그리스 또는 로마문명과 치열한 마찰이 발생했고, 중국과의 충돌에서 밀린 스텝지역의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고달픈 삶을 영위해왔다. 거센 문명권과의 마찰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강력한 신을 창조하여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라고 부른 조로아스터교와 배화교, 조로아스터교의 변형인 미트라교가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유대교의 신이 절대적 복종을 담보로 존재했다면, 이들 종교의 신은 응징자가 아니라 미덕의 신으로 다른 방법으로 구제할 수 없는 영혼을 구제했다. 불교의 보살과 흡사하다.

수많은 우화와 전설과 종교적 신화와 개념들이 인도로부터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티나로 전파됐으며, 페르시아와 인도가 기독교의 발생지인 중동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다. 불교는 교역과 전도를 통해 그리스 도시를 거쳐 지중해 연안으로 전파됐다. 그리스, 바빌로니아, 불교, 조로아스터와 같은 이질적 전통에 속하는 사상의 묘한 융합이 예수 탄생 100년 이전에 이미 진행됐다. 예수의 탄생을 확인하러 온 동방박사 3명은 조로아스터의 사제인 마기(Magi)라는 설이 있다. 선지자가 가족을 버린다는 것은 힌두교의 영향, 기독교의 윤리적 교의는 세례 요한을 거쳐 BC 2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비밀교단이었던 에세네파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불교의 사상을 차용한 흔적도 많다. 예수의 시대에 유대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강력한 지도자만 나타나면 로마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킬 태세였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자신의 임무를 종교인으로 제한했다. 유대교의 랍비는 그가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자, 자기들의 기능이 빼앗길 것 같아서 싫어했으며, 애국자들은 예수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싫어했다. 마침내 대제사장과 유대의회는 예수가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로마의 행정관은 주저했지만, 대제사장은 다시 예수가 스스로 유대왕을 참칭한다고 고발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반란에 아주 민감했다. 행정관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의 십자가형을 확정했다. 유대교의 이단으로 출발한 기독교는 그리스화한 유대인 바울에 의해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확장했다. 지중해 일대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는 자기들의 고통을 신과 동일하게 생각했다. 현세에는 평화, 기쁨, 보람이 주어지지 않지만, 내세에는 분명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신앙은 제국의 분열과 함께 급속도로 확산됐다.

초기 기독교는 왜 동방으로 전파되지 않고 서양으로 전파했을까? 조로아스터와 불교 때문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것은 이민족의 로마침공으로 인한 시대적 불안정과 로마의 쇠락과 관련이 있다. 군사력이 로마를 지탱하지 못하자 미래에 대한 새로운 보장이 필요했다. 단순한 기독교의 교리는 실용적인 로마인들의 구미에 맞았다. 기독교의 신은 믿기만 하면 영생을 보장했으며, 지옥의 불로 적을 격파할 수 있는 권능을 지녔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과 달랐다. 지금까지 로마를 지켜주던 신들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지 못하자, 로마인들은 새로운 신을 찾았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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