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는 티베트인의 모든 것이다. 오체투지(두 무릎과 두 팔, 머리를 땅에 대고 하는 절)는 부처님에게 온전히 나를 맡긴다는 의미의 예법이다. 티베트인들은 오체투지로 고향에서 티베트 성지 조캉사원까지 가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여긴다. (사진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불교는 티베트의 모든 것이다.”

티베트인에게 불교는 삶의 전부다. 불교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티베트 문화는 자발적으로 민족 중심적, 호전적, 제국주의적 문화에서 보편적, 불교적, 정신적, 평화적인 문화로 변모해왔다. 티베트인이 종교에 몰두하는 이유는 물질적 만족은 순간이며 온전할 수 없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전생과 내생(來生)을 믿으며, 내생을 준비하려면 반드시 종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티베트 불교 유래와 특성

티베트 불교는 7세기 송찬간포(松赞干布, Songtsän Gampo: 604~650)왕 때 중국 문성공주와 브리쿠티 데비 두 왕비가 중국계와 인도계의 불교를 도입했다. 라마교라고도 불린다. 당시 불교의 도입을 위해 산스크리트어의 경전을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도록 티베트 문자를 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티베트어 경전은 멸실된 산스크리트어 경전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티베트 불교는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를 배척하지 않고 혼합된 형태를 지니고 토착화했다.

그후 8세기 중엽, 인도의 샨티 락시타(寂護)와 파드마 삼바바(蓮華座)가 밀교(密敎)를 전한 뒤부터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됐다. 랑다르마왕이 한때 파불(破佛)했었으나 1038년경 인도에서 초빙된 아티샤가 티베트 밀교를 크게 개혁했다.

15세기에 총카파(宗喀巴)가 반야중관(般若中觀)사상을 기초로 하여 이를 밀교와 융화시킴으로써 티베트불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종파를 황모파(黃帽派: 게룩파)라 하며, 그 전의 종파를 홍모파(紅帽派:닝마파)라고 한다.

총카파의 제자 중 겐둔그룹(1391∼1475)이 초대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즉 법왕(法王)이 되어 현재 14대에 이르고 있다. 티베트불교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북인도·몽골 및 중국의 일부 지방에 있다. 티베트인은 티베트 불교가 인도불교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침공이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티베트인이 인도로 망명했다.

▲ 티베트 최대 불교 축제인 쇼톤 축제 모습. 하안거를 마치고 나오는 스님들에게 신자들이 떠먹는 요구르트를 올리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풍습에서 유래해 요구르트 축제라고도 불린다. (사진출처: 연합)

◆중국의 티베트 불교 탄압과 여론

중국의 티베트 불교 탄압은 ‘하나의 중국’을 만들려는 중국의 티베트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이다. 티베트 정신문화가 불교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개선돼 보이지만 중국은 여전히 티베트인의 종교기관과 수행에 대해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중국은 문화혁명 동안 파괴된 불교사원 개축을 허가제로 바꾸고 사원의 승려수를 제한하고 있다.

티베트 공산당원들이 불교를 믿는 것도 금지하며 ‘민주관리위원회’를 통해 각 사원에 대한 중국정부와 공산당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對 티베트 정책이 개인의 종교와 인권을 억압한다는 측면에서 국제사회의 비난 수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對 티베트 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은 반(反)중국적인 선입견과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는 시각도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환생으로서 14대에 걸친 윤회를 한 점을 최대한 이용한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재직 중에 나라를 잃은 책임과 13대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역대에 걸친 실정,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한 귀족들의 횡포 등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고통 받고 버림받은 티베트인의 아픔을 중국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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