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환경 전문가 포스코건설 이철 전무 인터뷰

지난 9월 포스코건설 이철 전무(수주영업실장)는 세계 3대 인명사전인 미국 ABI(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가 주관하는 ‘21세기 위대한 지성’과 ‘2009년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에 연달아 등재됐다. ABI는 미국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 영국 케임브리지 IBC(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er)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인명사전이다.

이철 전무는 환경부와 지식경제부 등 정부기관과 아시아·태평양 NGO 한국본부 등 환경관련단체 자문을 통해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물 관련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ABI에 이름이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 소년, 기사 읽고 장래희망 정하다

▲ 포스코건설 이철 전무는 소위 ‘물박사’라고 불린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전무는 까까머리 시절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경기고 재학 시절, ‘타임즈(TIMES)’에 실린 환경 기사를 보고 환경분야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당시 기사는 ‘국민소득이 1천 달러가 되면 환경법이 만들어지고, 3~5천 달러에 이르면 개발에 따른 물 관련 사건이 일어난다. 또 1~2만 달러가 되면 대기(大氣) 사건이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타임즈’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우리나라도 개발과 함께 환경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 1980년 환경청이 설립됐고, 1991년 낙동강 페놀유출사건이 발생하면서 환경문제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고등학생 때, 기사를 보고 환경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환경과 관련된 과가 있는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그 때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라경제를 일으키자는 데 주안점을 둬 환경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은 그나마 환경공학과 관련이 있는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였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생물공학을 전공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크란필드공대에서 생물공학 박사 과정을 밟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1989년에 학업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삼성엔지니어링, 포스코건설 환경사업본부 등을 거치면서 환경 전문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94년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난지도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김영삼 정부를 비롯해 현 이명박 정부까지 환경 자문을 구할 때 그를 찾는다.

◆ 물 값이 오른다면 물 부족 예방할 것

이 전무에 따르면 물과 대기는 앞으로 40년 후 석유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물과 공기를 지금부터라도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물 보존을 위해서 물값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수돗물값은 선진국의 5분의 1, 가장 비싼 스위스의 10분의 1 수준으로 매우 저렴하다. 때문에 국민들이 물을 사용할 때 적당량을 넘어 철철 넘치도록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들이 설거지를 할 때 물을 받아쓰는 습관만 기른다면 물 부족을 예방할 수 있다”면서 “한국은 영국보다 연간 강수량이 많지만 강수량이 장마철에 집중됐다. 이 강수량을 보존하기 어렵다면 아껴 쓰는 방법 외엔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우리나라 수질개선 기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을 유지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는 1991년에 발생했던 낙동강 페놀유출 사건 등으로 깨끗한 물에 대한 국민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어 “물 다음에 대기를 살릴 차례”라며 “수질과 달리 우리나라 대기 오염도는 OECD 회원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기가 나빠야 집값이 비싸다”고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꼬집었다.

그는 최근 자동차 휘발유와 경유 값이 비슷해지면서 쾌재를 불렀다. “우리나라 자동차는 80%가 경유다. 사실 대기오염의 주범은 휘발유가 아닌 경유”라면서 “선진국의 경우, 휘발유 소모량이 90%이다. 경유 사용 비율을 낮춰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 블루오션 찾는 혜안 필요

▲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 전무.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전무는 자신의 이름이 인명사전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로 “교수가 아니라서”라고 대답했다. “교수를 하고 있었더라면 세계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인명정보기관은) 아마 회사를 다니는 박사학위 소지자를 찾는 방법이 더 쉬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수는 늘 연구를 하는 것이 직업이고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경쟁자가 많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지만, 자신처럼 회사원이면서 전문 지식을 쌓고 연구한다면 돋보인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는 그에게 환경공학 교수직을 두 번씩이나 권했으나 그는 한결같이 거절했다. “학문 연구보다 실질적으로 도움되는 방법을 찾는 게 나의 사명”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전무는 1970년 중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환경공학을 찾아 길을 개척했다. “카이스트 재학 시절, 나의 연구발표엔 아무런 질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분야는 나 혼자였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당시 해외 유학을 할 경우 미국으로 많이 갔다. 반면 나는 영국행을 선택했다”며 “영국 유학만으로도 다른 사람과 경쟁할 때 나만의 무기가 된 셈”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보람을 느끼면서 지내다 보니 환경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또한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낀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헤쳐 나간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모두가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나는 환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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