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의 깊은 인간적인 내면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렇지만 겉으로만 볼 때는 차갑고 날카로우며 힘에 넘치고 강인해 보인다. 점성학에서 말하는 황도대(Zodiac)의 12궁 동물들 중에서 푸틴을 찾는다면 그는 사자가 딱 맞다. 일국(一國)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누구나 국민을 향해 자신이 최고의 ‘애국자’이며 ‘국리민복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서 국가를 통치한다. 통치 명분의 창조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칫 실수하기 쉽지만 푸틴이 그런 점에서는 어느 국가의 지도자보다 아주 특별한 지도자라고 말해도 되는 수긍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옛 소련의 국운이 쇠락해 해체(解體)의 국면으로 내리받이 길을 내달리던 1989년, 동독에서 활동하던 소련 첩보기관 KGB의 젊고 총명한 요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조국 소련이 망해간다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본국에서 돌아오라고 불렀을 때 ‘망해가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심정이 참담했다’는 얘기를 그로부터 10년 후 그가 러시아 대통령이 되기 직전 어느 인터뷰에서 토로했었다. 그렇다면 그가 2000년에 러시아 대통령이 된 것은 그 참담했던 우국(憂國)의 심정이 결정적인 추동력이 돼주어서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때부터 두 번 대통령을 연임한 후 국무총리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3번째 임기를 수행 중인 지금도 그 참담했던 심정을 마음속으로 곱씹고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옛 소연방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놓아주려하지 않는다. 서방(The West) 역시 러시아의 가장 취약한 옆구리(Flank)이거나 하체 중심부에 해당하는 전략 요충인 우크라이나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금처럼 양측이 강(强) 대 강(强)으로 부딪치는 기조에 변화가 없는 한 푸틴에게도 서방에도 똑같이 엄청난 모험이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서구가 이용하던 소련으로 치고 들어가는 침공 루트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군대도 히틀러의 나치 군대도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을 지나 소련에 쳐들어갔었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어 서구에 편입되려 하는 것을 푸틴이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서구 편입을 위해 정부 차원이나 시민 단체들이 나서 우크라이나 안에서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러시아로부터의 탈 궤도(脫軌道)를 부추겨온 것이 사실이다. 어디에서 벌어지거나 그런 일이 숨겨질 수는 없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강대국은 자신의 핵심이익(Core interest)이 침해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핵심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추상적인 정의(正義)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힘(Might)으로 지킨다. 강대국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힘을 행사함으로써 구현된다.

러시아는 딱히 국운이 오름세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인 것은 틀림없다. 거기다가 그들의 지도자가 옛 소련의 쇠락에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던 사자와 같은 푸틴이라고 볼 때 한번 움켜쥔 우크라이나의 목덜미를 어떤 모험적인 상황과 마주치더라도 결단코 쉽게 놓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그들의 핵심이익이 걸린 지역이며 서구로 편입되면 옆구리가 심하게 결리게 될지라도 서방과의 샅바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겨야 정의의 여신이 보내는 미소를 끝까지 향유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서방이 물러서 주면 푸틴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만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소련의 붕괴로 러시아의 턱 밑까지 한껏 파고들어 확장된 NATO의 영토가 소련 해체의 역(逆) 도미노 현상으로 야금야금 다시 축소되는 것을 서방은 참아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이런 사태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본다면 초장인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푸틴에 제대로 교훈을 주고 본때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결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서방이 일사분란하게 순발력 있게 뭉치기는 어려워도 푸틴에 대응할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푸틴 역시 한 없이 러시아를 향해 파고드는 NATO와 EU의 영토 확장을 좌시할 수만은 없어 전격적으로 크리미아 반도를 꿀꺽 삼킨 데 이어 우크라이나 반군에 대한 지원으로 우크라이나의 힘을 빼면서 분단을 꾀하고 있다. 양측이 이렇게 결연히 맞서기 때문에 당장은 마주 달리는 자동차 기 싸움, 치킨 게임(Chicken game)처럼 커다란 참화를 향해 질주하는 것 같아 보인다.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장벽이 동서독 시민들에 의해 무너지고 1991년 12월 25일 소연방이 해체됨으로써 냉전은 끝났다고 환호했었다. 그렇지만 미국 영국 독일이 나선 서방측과 소련 사이에 정식 통독(統獨)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면서 NATO 문제를 말끔히 정리해두지 않은 것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촉발시킨 요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니까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는 대신 NATO는 소련 국경 쪽으로 동진(東進)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다. ‘그것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 러시아의 주장이고 ‘그런 약속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확실한 것은 몰라도 적어도 문서로 된 확약은 없는 것이 맞다. 이렇게 협상의 모호성이 빌미가 되어 NATO는 러시아 국경을 향해 확장되고 러시아는 이에 날카롭게 반응하며 반격한다. 냉전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현행의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우크라이나 사태로써 끝이 날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러시아가 으르렁거리지만 그것은 정작 우크라이나를 위해서라기보다 강대국인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다. 어느 쪽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발언이 경청되거나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다. 힘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엄연한 국제 현실을 벌로 보면 큰일난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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