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프로레슬링은 스포츠가 아니라 쇼다.” 지난 1960, 70년대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던 프로레슬링은 장영철의 이 한마디로 급전직하, 무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말이 나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프로레슬링은 김일과 같은 영웅들이 일본 안토니오 이노키 등 상대 라이벌 선수 등을 링 위에서 통쾌하게 제압하며 최고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박치기의 명수’ 김일이 극적인 역전승으로 승리를 할 때는, 월드컵 4강 진출 못지않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며 온 국민을 환호와 열광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일본 선수와의 석연치 않은 승부 끝에 링 난투극을 벌여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장영철이 이 같은 폭탄발언을 함에 따라 일반 국민들은 “프로레슬링이 선수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TV 등 국내 언론들은 중계방송과 지면 보도 등을 전면 보류했고, 프로레슬링은 국민들의 관심을 떠나는 운명에 처했다.

대표적인 쇼비즈니스인 프로레슬링의 기억이 다시 살아난 것은 ‘은둔의 왕국’ 북한 평양에서 국제레슬링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지난 주말 미국의 밥 샙 등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선수들이 1만여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평양국제레슬링대회에 출전했다고 미국 CNN 등 외신들이 전했다. 이번 평양 레슬링대회는 1995년 이후 19년 만에 열린 것으로서 프로레슬링 선수 출신인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 참의원이 대회 개최를 주도했다는 설명이다.

소식통들은 “레슬링 선수들이 한동안 받지 못했던 스타 대접을 북한에서 받았다. 19년 전에는 프로레슬링 경기 당시 선수들이 진짜 싸운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프로레슬링을 좀 더 잘 알고 있었다”면서 관중들이 많은 관심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은 이번 레슬링대회 기간 중 CNN 등 외신 기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캐리비안베이와 같은 테마형 수영장인 문수놀이장과 승마장, 테마파크 등을 돌아보는 투어를 갖도록 했다. 또 레슬링대회 참관차 평양을 들른 오바마 대통령의 친구 미국 래퍼 프라스 미셸은 대동강변에서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적인 사회이벤트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하면서 얼음물을 두 차례나 뒤집어 써 평양 주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북한이 반칙과 담합이 허용되는 대표적인 자본주의인 레슬링 국제대회를 유치하고, 여러 생활체육 시설을 공개하고, 세계적인 유행인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갖도록 허용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 북한의 모습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레슬링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한반도에 긴장 국면을 조성하는 한편으로 레슬링대회 유치, 인천아시안게임 참가 등 유연한 제스처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북한의 태도를 항상 회의적이고 경계를 하면서 봐야 하는 것은 이러한 표리부동한 자세 때문이다. 최고 지도자 김정은의 공식적인 모습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마이클 조던의 팬으로 농구광으로 알려진 김정은은 지난해 미국 프로농구 스타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먼을 초청해 친선 경기를 갖도록 했으며, 참가여부가 불투명했던 인천아시안게임에 선수단을 전격적으로 파견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 김정일과는 다르게 스포츠에서 친화적인 행보를 걸으면서도 김정은은 북한군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낙하산 군부대와 기념사진을 찍는 등 호전적인 모습도 서슴지 않는다.레슬링 국제대회 등 스포츠에 대한 대외적인 개방은 북한의 민주화, 자유화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부의 교묘한 통치술의 일환으로 프로레슬링의 재미에 푹 빠졌던 우리 국민들이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한마디로 레슬링의 거짓된 실체를 알고 새로운 각성을 다질 수 있었던 것처럼, 북한에 자본주의 스포츠가 계속 들어가다 보면 인민의 인권을 무시하고 독재 수령 족벌체제를 구축한 북한의 사회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분별하는 비판적인 안목이 점차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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