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병사로 군에 다녀온 사람들이 모이면 할 얘기들이 많다. 얘기꽃이 활짝 피기 마련이어서 쉬지 않고 날밤을 새우래도 새울 것이다. 경쟁적으로 나서는 화자(話者)들이 신이 나다보면 다소는 과장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너무나 많은 경우에 마치 딴 세상 체험과 같은 얘기를 허다하게 듣게 된다. 어떤 경우는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가 하면 ‘몬도가네’ 영화를 보거나 절해고도 감옥에서 탈출한 ‘빠삐용(Papillon)’의 고백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평균적인 국민이 하루 세 끼 먹는 것조차 힘들고 사회 분위기마저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당당히 내세우기에는 왠지 으스스하고 쭈뼛거려지던 시절에 군에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는 대부분 이 같은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당하지 않은 ‘강압’이 통하던 시대였다. 부패가 만연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불의가 정의로, 불공평이 공평으로 물구나무 서는 것이 다반사였던 때다. 군대라고 특별하게 예외 지대였거나 청정지역이었을 리는 없다.

군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격한 군율(軍律)이 지배하는 상명하복의 특수 집단이며 조직이다.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한다. 타당한 이유가 부족한 응석이나 태만, 불평불만, 심지어 파문이 집 밖으로 번지는 탈선까지도 가족애의 무한한 아량이 베풀어지는 따뜻한 한핏줄의 보금자리인 가정과는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추호라도 군이 인권의 사각지대이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짓밟는 무지몽매한 퇴행적 집단이 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지금은 시대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고 변했다. 국력이나 국위, 국격, 국민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달라졌다. 군도 말하자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두 측면 모두에서 그에 발맞추어 선진 군대로 발전해야만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고 청년들이 기꺼이 군 입대에 응하는 진정한 국민의 군대가 될 수 있다. ‘허명(虛名)의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만이 아니라 군의 현실적인 실체가 그렇게 돼야 마땅하다.

그러려면 얼마 전 선임병들의 무자비한 폭력 행사로 목숨을 잃은 육군 28사단 윤 일병 사건과 같은 일은 송두리째 뿌리가 뽑혀야 한다. 그런 악습이 이어져 내려오게 해서는 진정한 민주군대, 국민의 군대, 선진 강군으로 가는 길은 멀다. 대신 군 조직과 병력 관리에 있어서 엄정한 군율과 군기가 보편적이면서 원칙대로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군의 어느 일각에서라도, 혹여 은밀히라도 그 틀에서 벗어난 인격 모독과 폭언, 폭행, 매질 등의 물리적인 가혹행위가 자행되도록 묵인 내지 방조돼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한없는 연민과 근심 걱정으로 자식들을 군에 보내는 국민들로부터 군이 사랑과 신뢰를 받는 길이다. 군은 국민의 관심과 사랑, 배려 없이 강군이 될 수 없다.

군 경험 얘기를 ‘몬도가네’나 ‘빠삐용’ 영화, 솔제니친 작품이나 무슨 괴기소설 줄거리를 말하듯 들려주는 나이든 전역자들이 말미에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자신의 얘기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이지 설마 지금 젊은이들이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가 그것이다. 그런데 윤 일병 사건만을 통해서 본다면 군은 여전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후진군대 그대로다. 더구나 비슷한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 않는가. 젊은 병사들이 걱정이고 군도 걱정이다. 첨단 무기로 무장만 했다고 해서 선진 군대가 아니다. 이 같은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미성숙 집단의식과 집단정신이 혁신되지 않고서는 선진 군대라 하기 어렵다.

군은 일사 분란한 지휘체계를 생명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병사들 간에 벌어지는 일이라 해도 상위 지휘체계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후책임만이 아니라 사전 예방의 책임도 지휘계통에 있다. 사전 예방은 더욱 중요하다. 이는 ‘책임’일 뿐 아니라 ‘능력’이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외 없이 존엄한 인격체다. 따라서 군의 전반적인 병영 문화가 병사들을 ‘수단’이나 ‘도구’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인격 존중’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불미(不美)한 사건 예방의 첫 출발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같이 고귀한 ‘리더십(Leadership)’이면 그 리더십을 믿고 따르지 않을 부하 병사가 없을 것이며 병사들 간에 전투에 강한 필승의 진정한 전우애와 우애가 생성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대가 변한 것은 어느 집이나 병력 자원이 되는 자식들이 한둘 밖에는 없다는 것에서 실감한다. 그들은 대부분 ‘귀족’처럼 편하고 귀하게 자라난다. 거의가 고학력이다. 그렇다고 다가 유약한 ‘마마보이(Mama boy)’가 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능숙한 첨단 ‘디지털 세대의 원주민(Digital native)’이며 세계인들을 사로잡은 수준 높은 한류(韓流) 문화에 흠뻑 젖어 사는 수준 높은 문화의 세대다. 창의적이고 자율적이며 납득이 되는 동기가 부여되면 어느 세대보다도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거기다 가치 있는 규칙과 원칙을 준수한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이 크게 걱정했지만 연평해전을 목숨 걸고 승전으로 이끈 영웅적인 그 신세대와 가슴과 정신, 행동 양태가 같다. 이만하면 세계 최고의 인적 자원이며 병력 자원이다. 이같이 우수한 자원을 데려다가 최강의 군대를 만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나.

국민개병제 하(下)에서 때가 되면 젊은이들은 숙명적으로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에 실려 가듯 군에 불려 간다. 그저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집행되는 과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의미심장한 ‘인생 노정(路程)’이다. 그 길을 ‘빠삐용’ 감옥 가듯이 막연한 공포에 짓눌려 가게 해서는 안 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며 그 과정을 통해 ‘진짜 어른’ ‘진짜 사나이’가 되는 길이라는 사명감과 확신 자부심에 충만해 그 길을 가게 해야 한다. 이런 자원들이 첨단 무기와 만나면 무적(Invincible)의 군대가 된다. 윤 일병 사건과 그 비슷한 사건들이 너무 안타깝다. 이렇게라도 진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그 분하고 억울한 죽음들을 승화(昇華)하는 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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