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나라를 송두리째 고려 임금 왕건에게 바치고 투항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왕족과 신하들은 왕건의 후한 환대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강원도 인제군 삼남면에 가면 금부리(金富里-경순왕 본명)나 다물리(多勿里)에 신라 왕족들이 숨어든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경순왕이 나라를 통째로 왕건에게 바치려 하자 태자였던 일(鎰-마의태자)은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어찌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넘겨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것은 천명인데 최후까지 고려와 싸워야 합니다.” 태자 일은 결사 항쟁을 주장했다.

“이렇게 외롭고 위태로운 형태로는 도저히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이 전쟁에 내몰려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순왕은 눈물을 뿌리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자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자는 모후 박 씨와 태자비 김 씨, 두 아들과 충신, 의사, 유민 등 그를 따르는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로 숨어들었다. 그는 그곳에 신라소국(新羅小國)을 세워 신라 부흥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태자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고려에 항거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마의(麻衣)를 입고 금강산에 들어가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으며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마의태자였다.

경순왕은 두 명의 부인한테서 8명의 아들을 두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마의태자 외에도 출중한 왕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자 한 명은 스스로 자결하여 귀한 목숨을 버렸는가 하면 절간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 인물도 있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머지 왕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하는 것이다. 마의태자가 고려에 강력히 저항하며 유민들과 함께 신라 부흥을 꿈꾸었다면 쉽게 금강산으로 들어가 초식으로 연명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예로 인제의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경순왕의 호칭) 제단(祭壇)에는 기일이 되면 천자에게 올리는 4배를 지냈다고 한다.

또 하나 특이한 사항은 갑둔리 유적 오층석탑의 ‘금부수명장존가’ 비명에는 ‘요 성종 태평 16년 병자. 고려 정종 2년(1034년)’이라는 간지도 있다. 그곳 제단에는 경주 천마총의 천마상의 혈통적 의미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마상도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 지명의 대왕릉터, 갑둔리, 항병골, 군량리 등 군사 용어와 관련 된 명칭들을 새겨 보면 신라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영토회복의 의미가 깃든 곳이라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시점과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이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 여진으로 들어가 태사가 되었다는 시점을 연계시켜 볼 필요가 있다.

만주에 강력한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 10년(1115년)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의 조상은 신라인이라고 했다. 고려사에는 아골타의 조상이 여진으로 들어가 태사가 되었고 이달에 생여진(生女眞) 아골타가 황제라 일컫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록대로라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신라의 마의태자가 아니면 양국(讓國)을 극력 반대한 왕자들이나 왕족 중 누군가는 한반도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여진으로 들어갔다는 기록들은 사실대로 밝혀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막강했던 금나라 황제가 왜 굳이 자신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넘어온 신라인이라 했는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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