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언론관련법 권한쟁의심판 청구소송'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역시 우려하던 대로 내려졌다. 방송법 등 무효확인 청구가 기각된 것이다.

헌재의 결정 내용을 요약하자면 절차상의 위법성은 있으나 법률을 무효로 할 정도로 중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정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헌재재판관들이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권한이 없는 사람에 의한 임의의 투표행위나 대리투표로 의심받을 만한 행위 등 극히 이례적인 투표행위가 다수 확인됐다.” “표결 과정에서 표결의 자유와 공정이 현저히 저해돼 결과의 정당성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다.”

재판관들은 머리를 싸매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허다한 위법성을 확인했다. 특히 일사부재의 논란과 관련해서는 과반수가 넘는 5명의 재판관이 “투표 집계 결과, 재적의원 과반수에 미달한 경우 부결로 확정되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재표결을 해 가결을 선포한 것은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배한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도 헌재는 ‘헌재는 권한 침해만 확인하고 사후조치는 국회에 맡겨야 한다’ ‘일사부재의 위반은 인정되지만 가결 선포를 무효로 할 정도는 아니다’라며 언론관련법 유효를 선언했다.

논리적 모순의 결정판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내린 결정이라고 믿기에는 어이가 없다. 때문에 무효라는 결정이 몰고 올 엄청난 후폭풍을 두려워한 헌재의 비겁한 정치적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정은 위법이나 결과는 합법이다’라는 이번 결정으로 우리는 학생들에게 도덕교육을 할 명분이 없어졌다.

헌재 결정이 내려지자 한나라당과 정부는 한숨을 돌린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헌재 결정의 행간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헌재가 비록 비겁한 결정은 내렸지만 내세운 전제에 담긴 의도는 분명하다. 쉽게 해석하자면 ‘언론관련법 강행통과는 위법하지만 차마 우리 입으로 무효라고 하기는 곤란하니(혹은 말할 용기가 없으니) 정치권이 잘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쯤 될 터이다.

한나라당이 상식적 판단을 할 안목이 있다면 법 통과 과정상의 위법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이에 합당한 후속 조처에 들어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앞뒤 문맥을 거두절미하고 헌재의 ‘유효’ 결정만을 내세우고 있다. 헌재가 미디어법의 유효성을 재확인해줬으니 이제 후속절차에 들어갈 차례라며 서두르고 있다. 헌재 결정의 진정한 의미와 국민 대다수의 여론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심한 행보이다.

10.28재보선이 끝나자 민주당은 환호작약하고 있다. 3대2의 결과는 사실상 승리라고 해석하며 “국민이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고 만세다. 정부의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무력화시도에 대한 국민의 냉혹한 심판이라며 들떠 있다.

이 같은 민주당의 생각에 시비 걸 마음은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번 재보궐선거 결과는 민주당이 예뻐서라기보다는 한나라당이 미워서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다. 수원 장안의 경우는 손학규 전 대표의 정치적 생명을 건 지원유세와 성균관대 학생들의 적극적 투표참여로 신승을 했다. 안산 상록의 경우는 모처럼 호남표가 결집한 데다 후보의 고향인 충청표가 가세해 낙승했다. 충북 진천 등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정부의 세종시 무력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리가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승리한 어느 한 곳 민주당이 좋아서 표가 몰린 게 아니라는 점을 민주당만 모르고 있다. 특히 안산의 경우는 진보진영과의 후보단일화 실패가 향후 정국, 특히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의 전략적 연대에 찬물을 끼얹을 지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축배의 달콤함에만 빠져있다. 민심의 흐름을 멀리, 그리고 깊이 내다볼 줄 모르는 민주당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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