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한바탕 북새통 같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선거는 끝났으나 승자의 의기 양양함만 보이고 진정으로 민심에 대한 겸허한 수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선거에서 이긴 사람도 투표인의 절반 넘기는 지지표를 얻기는 힘들다. 지난 10월 28일 재보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재보선의 투표율은 과거의 평균을 넘겼다해도 40%에도 미달했다. 나머지 60%가 외면한 선거에서 이겨놓고 천하를 얻은 것 같은 의기양양함을 보이는 것은 오만이다.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대의 정치다. 한 표라도 더 얻는 사람이 투표에 참여했던 안 했던 국민과 주민의 대표라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승자 독식으로 패자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패자를 지지한 목소리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묻힌다. 냉정하지만 이렇게 승부를 가리지 않을 방법이 없으므로 어찌보면 아직까지 인류가 창안한 가장 훌륭한 정치제도라는 민주주의는 좋고도 잔인한 제도다.
그렇다 해서 승자의 영광스러움을 폄하할 이유는 물론 없다. 기권표가 더 많은 상황에서도 한 표라도 더 이긴 것은 이긴 것이다. 그 많은 기권표들이 투표에 참여했더라도 꼭 결과가 뒤집힌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소수 투표자의 지지일망정 그것이 민심이요 천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대로 민주주의는 과정과 그 과정의 내용이 중요한 제도다. 찬성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대도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소리 없는 다중의 의견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을 안다면 선거에 이긴 사람은 승리에 너무 들뜨지 말고 자신의 지지표만큼이나 많은 반대표의 의미를 곰곰이 헤아리고 이를 슬기롭게 반영하는 일을 고민해야 맞다. 여당이나 야당, 여당후보나 야당후보가 다 그리해야 이 시대의 숙제인 국민통합, 사회평화가 온다. 또한 정치 불신을 씻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적어도 반대표나 기권표만큼의 정치 불신은 언제나 안고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여야의 셈법은 대단히 소아(小我)적이다. 국민이 무엇을 심판했느니 어느 당의 손을 들어 주었느니 등의 작은 이해타산이나 편협한 판단은 앞으로 정치판이 싸움판이 될 것임을 예고할 뿐이다. 그것을 국민이 바라겠는가.
우리의 선거, 특히 나라의 일꾼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가 갈수록 지역 선거화 하고 선거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나라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우려할 만한 일이다. 나라를 떠받치는 큰 권력기구인 입법부에서 일할 사람들이 자치단체장 후보들이나 해야 할 지역개발 공약이나 쏟아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 못된다.
마찬가지로 묘하게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언동도 없어지지 않고 되풀이 되고 있다. 더구나 이런 것들이 중앙당의 비호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언제나 이 나라의 정치수준이 좀 더 나아질 것이냐에 대한 전망을 암울하게 한다. 지역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모른 채 할 수 없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들을 솔깃하게 해 표를 얻는 이런 공약들이 승패의 요인이 된다면 정말 훌륭한 정치 재목을 길러내야 할 국회의원 선거의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는 이런 선거가 우리 사회 풍조를 얼마나 흐려놓고 있느냐에 대해 정치인들은 얼마나 깊은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승자의 오만과 독선이 얼마나 많은 정치와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입신양명이나 권력의 쟁취, 축재(蓄財)에 있어 수단방법은 중요치 않으니 묻지 마라는 식의 풍조를 조장하는데 선거가 일조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바라건대 당선자들은 승리의 기쁨으로 오만하지 말고 국격을 높이고 경제를 살리며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무엇보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대의(大義)의 정치에 일조해주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국회의 토론과정에서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억누르는 절차적 하자가 되풀이 돼 국민의 저항이 있게 해서도 안될 것이다. 동시에 다수를 무시하고 능사로 떼를 쓰는 소수의 버릇도 재보선에서 뽑힌 새로운 일꾼들로 충전된 국회에서는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