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秘儀)

박희진(1931~ )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무르익어 떨어지는 도토리의
그것을 받아주는 너럭바위 없다면
어떻게 뚝! 소리가 나랴?

흐르는 물 기운과
그것을 막는 바위들 없다면
물은 어떻게 희희낙락 환장하며
하얗게 속내를 드러낼 있으랴?
 

[시평]
살아가면서 흔히 ‘너’라는 상대는 생각하지 않고, ‘나’만을 생각함이 일반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 조금만 ‘나’ 외의 ‘너’를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가고 또 내가 이렇듯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함께 ‘너’라는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임을 이내 알게 된다.
도토리가 무르익어 나무에서 떨어질 때, ‘뚝’ 소리가 나야 비로소 그 소리에 의해 도토리가 떨어졌구나, 하고 도토리의 존재를 알 수가 있다. 비록 하찮은 소리이지만, ‘뚝’ 하는 소리는 도토리의 존재를 알리는 장치이리라. 그러나 나무 밑에 너럭바위가 없었다면, 이 ‘뚝’하는 소리는 과연 있었을까. 너럭바위는 도토리에게 도토리의 존재를 알리는 소중한 무엇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흐르는 물이 아무러한 장애물 없이 흘러간다면, 물은 다만 흐르는 것일 뿐, 희희낙락 애환을 나눌 수 있을까. 바위에도 부딪치고, 또 흰 포말도 일으키며 흘러내려갈 때, 물은 비로소 흐르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삶이 바로 ‘너’와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껴안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갈 수 있듯이.
내가 있고 네가 있으므로 서로가 서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하찮은 도토리와 너럭바위, 그리고 흐르는 물과 바위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비의(秘儀)’가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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