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디오니소스(Dionysus)는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는 박카스(Bacchus)다. 디오니소스는 물론 연극의 신, 다산의 신이기도 하지만 대표적 상징은 술의 신이다. 술은 사람을 흐트러지게 한다. 이로부터 디오니시안(Dionysian)은 ‘디오니소스형의 인간’ 즉 ‘마시고 떠드는 인간 형’을 의미한다. 그 뜻이 그 뜻이지만 ‘흥청망청하는 인간형’ ‘제멋대로의 인간형’ ‘열광적인 인간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반대의 인간형은 아폴로니안(Apollonian)이다. 디오니시안과 달리 규율을 준수하고 온화하고 이성적이며 균형 잡힌 인간형을 말한다. 아폴로(Apollo)는 태양의 신이다. 빛 의학 음악 시 젊음 남성미 등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폴로로부터 연유한 ‘아폴로니안’ 즉 ‘아폴로 형 인간’의 의미는 저절로 유추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존재와 비존재 즉 색(色)과 공(空), 흑과 백, 내 편 네 편, 선과 악, 이런 식으로 사물과 개념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가르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사람 자체는 디오니시안이니 아폴로니안이니 하면서 두 유형만으로 가르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다. 선비는 예로부터 홀로 있을 때라도 행실을 바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사람은 집안에 혼자 있을 때나 밖에 나가 어울릴 때나 명실상부한 아폴로니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실에 빈틈이 없는 사람도 여럿이 뒤섞이는 술자리에서는 디오니시안에 가까워지기 쉽다. 사실 좀 그래야 정이 간다.

반대로 긴장이 풀어지는 퇴근 후에는 누구나 디오니시안이 되기 쉽다. 아니 디오니시안이 되고 싶어진다고 해야 맞을까. 물론 한 잔 걸치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라 해서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까지 아폴로니안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폴로니안 상(像)은 사회적 공간에서 보여주어야 할 미덕이다. 사람은 상황과 경우에 맞게 처신하는 존재인 것이다. 상사가 있고 부하가 있으며 일에 쫓기는 직장에서는 아폴로니안이 돼야 한다. 퇴근 후에 디오니시안이 되고 안 되고는 그 다음 선택이며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이렇게 사람은 때로는 디오니시안이 되기도 하고 아폴로니안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 어느 상황, 어느 경우에나 고정된 어느 한 쪽만은 없다고 봐야 한다. 뿐인가. 인간 자체가 복잡한 것으로 말하면 그 두 유형이 뒤섞일 수도 있고 두 유형을 가지고 아무리 궁리를 해도 설명이 안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혹여 어떤 뛰어난 사람이 이 세상에 교훈을 남길 목적으로 이렇게 무리한 시도를 했다면 그는 아마 아폴로니안 인간형을 권장하려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과 휴식이 적절히 조화돼야 일도 능률이 나고 휴식도 의미가 있듯이 인간형도 디오니시안이나 아폴로니안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두 유형이 잘 조화돼야 정말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인간형이 될 것 같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일도 하지만 마시기도 하고 노래도 하고 놀이도 하고 빈들거리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는 죽자사자 일만하는 개미의 근면함만 미화되고 베짱이의 게으름은 형편없이 매도된다. 일견 그렇게 보인다. 그렇지만 배고픈 베짱이가 어떻게 노래나 부르고 놀기만 할 수 있을 것인가. 베짱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데는 뭔가를 부지런히 움직여 충분히 챙겨 먹고서 배가 따뜻해졌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는 베짱이의 휴식 시간을 ‘베짱이 생활’의 전부라고 잘못 본 것이다. 개미는 어떤가. 일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개미집은 왜 있는 것이며 추운 겨울에 대비해 먹을 것은 왜 그 속에 쌓아 놓는가. 그 안에서 편안하게 먹고 쉬고 놀고 자고 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닌가.

개미는 군집 공동생활을 하며 추운 겨울을 나야 한다. 따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베짱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여름 한 철이면 생명이 끝난다. 겨울을 날 필요가 없다. 그런 점들은 간과가 됐더라도 베짱이처럼 한 철만 사는 존재가 아닌 사람은 개미의 근면성과 앞날에 대한 대비의 본능을 배워야 한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그것을 가르친다.

어떻든 사람은 놀기도 해야 하지만 때를 맞추어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 동진(東晋) 중기에서 송(宋) 초기까지 살았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 말미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한창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새벽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는다 / 때맞추어 열심히 살아야 할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성년부중래 일일난재신 급시당면려 세월부대인/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 선생님이 학생에게, 어른이 젊은이에게 흔히 이런 말로 훈계하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은 정작 귀찮은 잔소리로 듣기 쉽다. 그럴 때 그 어른 그 선생님이 혹시 성년(盛年)에 면려(勉勵)하지 못한 경우라면 자기의 체험 때문에 그 제자 그 젊은이가 더 안타깝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은 다 안다.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는지, 누가 일은 팽개치고 농땡이 치며 싸움질이나 하려 하는지를 다 안다. 개미처럼 움직여야 할 국회에 국회의원들이 미루어 놓은 ‘숙제’만 먼지가 나앉은 채 숱하게 쌓여있다는 것도 국민들은 다 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의 입에서는 뭘 잘했다는 말보다는 앞으로 정말 잘 해볼 테니 허물을 용서하고 표를 달라는 구차한 읍소가 터져 나오지만 그런 각오는 선거 때뿐이다. 뽑아 놓으면 디오니시안이 되고 베짱이가 된다. 새 정권이 출범한 지도 벌써 새 정권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세월이 많이 갔다. 걱정이다. 정부나 국회 지도자들이 아폴로니안의 이성과 개미의 근면함으로 일해주기를 갈망하는 국민의 기대가 어긋나면 안 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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