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50~60년대를 살아온 사람은 새벽녘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메밀묵 사려!” 하는 아련한 추억의 소리가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사철에 서민이 즐겨 먹을 수 있는 묵은 ‘메밀묵’일 것이다. 그러나 묵이 어디 메밀묵뿐이랴! 봄이나 초여름에는 청포라 부르는 녹두묵이 있고, 7·8월에는 강원도 두메산골 사람이 즐겨 먹는 강냉이로 만든 올챙이묵이 있으며, 가을에는 도토리나 상수리로 만든 상실(橡實)묵이 있다.

‘옹희잡지(甕餼雜誌)’에 보면 “흉년에 산속의 유민(流民)들이 도토리를 가루 내어 맑게 걸러 낸 뒤 쑤어서 청포처럼 묵을 만드는데, 이것은 자색(紫色)을 띠고 맛도 담담하지만 능히 배고픔을 달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도토리나 상수리는 가뭄이 들면 들수록 더 토실토실하게 잘 열리므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더 할 수 없는 식량의 하나였다.

이렇듯 녹두묵이 양반의 먹거리였다면 메밀묵과 올챙이묵, 상실묵 등은 서민과 친숙한 먹거리였다. 우리가 즐겨 먹던 묵의 어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1827년에 황필수가 쓴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녹두가루 쑤어서 얻을 것을 삭(索: 새끼꼴 삭, 얽힐 삭)이라 하는데, 속간(俗間)에서는 삭(索)을 가리켜 묵(社에서 士자 뺀 실사 변+墨: 두겹노 묵, 말고삐 묵)이라고도 한다. 묵(墨)이란 억지로 붙인 것이다.

한편 1885년에 쓰여진 ‘사류박해(事類博解)’에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봤는지 녹두부(綠豆腐)이라고 기록돼 있다. 우선 1800년대 말 작가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기록된 메밀묵 만드는 것을 보면 “녹말을 가는 체로 받쳐 물에 가라앉힌 후 물만 다라 버리고 쑤되 되면 딱딱하고, 불이 세면 누르니 만화(慢火: 뭉근하게 타는 불)로 쑨다. 소금, 기름, 깨소금, 고춧가루를 넣고 무쳐 담을 때 김을 부수어 쓴다”고 기록돼 있다. 메밀묵을 채 썰어 멸치 등으로 육수를 내어 담고 그 위에 김장김치를 잘게 썰어 넣고 김가루와 깨소금을 넣은 메밀묵채는 맛이 구수하고 깔끔하다. 묵 중에 귀품이 있는 음식은 역시 청포(淸泡)라 불리는 녹두묵일 게다. 깔끔함과 화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잔칫상에 올리는 탕평채(蕩平菜)의 주재료가 바로 녹두묵이다.

탕평채는 1700년대 말의 문헌인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탕평채(蕩平菜)라는 칭호(稱號)는 그 후에 나온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규곤요람(閨壺要覽)’ 등의 문헌에 탄평채(坦平菜), 탕평채방(蕩平菜方), 탕평채 청포(蕩平菜 淸泡), 녹두묵 탄평채(坦平菜), 묵나물, 묵채, 묵청포, 묵초나물 등의 다양한 변형으로 등장한다. 궁중 연회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는 청포채(淸泡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명물기략(名物紀略)’에 “녹두묵은 노랑 것을 황포(黃泡), 파란 것을 청포(靑泡)”라고 쓰여 있다. ‘옹희잡지(甕餼雜誌)’에는 “반드시 녹두로 만드는데, 치자 물로 빛깔을 내면 맑은 노랑색이 나므로 매우 아름답다. 황두(黃豆)로 만든 것은 빛깔, 맛이 다 떨어진다”고 했다. ‘명물기략(名物紀略)’에 “정조(正祖) 때 사색인(四色人)의 탕평(蕩平)을 바라는 마음에서 갖은 재료를 고루 섞은 묵나물에 탕평채(蕩平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돼 있다. 탕평(蕩平)은 ‘서경(西經)’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당무편 왕도평평(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는 글귀에서 유래한 것으로 싸움이나 시비, 논쟁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함을 뜻한다.

탕평채(蕩平菜)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한다는데,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고기의 붉은색은 남인을 의미한다. 한낱 묵 요리가 탕평채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을 갖게 된 배경에는 영조의 화합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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