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세상은 치열한 전쟁터와 같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각오로 산다. 빌어먹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니까. 누구나 장수를 꿈꾼다. 터무니없는 욕심인 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천년만년 살고 싶지 않은 사람 드물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렇기에 진시황(秦始皇)이 불로초를 찾은 것이다.

진시황이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천년만년 살고 싶다는 욕심을 토로한다. 아무리 산천초목도 벌벌 떠는 황제라지만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낯 뜨거운 욕심을 신하들 앞에서 입에 담을 수 있는가. 무한 권력과 부귀영화는 가끔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별심을 잃게 한다.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신분으로 살다보니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철리에도 저항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떻든 황제가 이렇게 말하는데 못 들은 척 할 수도 없고 더욱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쏘아붙이거나 직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폭군이었다. 귀중한 서적들을 수거해 불태워버리고 이에 항의하는 유생 450여 명을 땅에 생매장해 죽였을 정도다. 이른바 갱유분서(坑儒焚書)다. 그런 황제 밑에서 아부가 입신(入神)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아부꾼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어떤 신하가 황제를 솔깃하게 한다. “동해안 삼신산(三神山)에 가면 몇 만 년 살게 하는 불사약을 구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말에 황제의 눈이 갑자기 크게 열리며 빛이 났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가. 누가 그 곳을 아는가.” 이래서 서복(徐福)이라고 하는 도교(道敎)에 심취한 방술사(方術士)가 황제 앞으로 불려왔다. 그는 거짓말임에도 태연하게 “진짜 불사약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렵긴 하지만 신이 직접 가서 구해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황제는 마음이 달아올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불사약을 구해오는 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 짐이 모두 하사할 것이니라.”

서복은 말한다. “큰 배 10척, 미소년소녀 각 5백 명, 금과 은 등 보물, 식량 1백일 분, 기타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족하게 주시면 틀림없이 구해오겠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흔쾌히 서복의 청을 들어주었다. 서복은 성대한 환송 의식 속에서 길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는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서복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서복에게 속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지만 아무도 황제에게 그렇다고 간(諫)하는 사람도 없었다. 황제가 쓴 소리를 싫어하고 복배감언(伏拜甘言)만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서복인들 황제가 저렇게 애타게 불사약을 찾으며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감히 못 구한다고 박절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꿈은 동양 사람에게뿐이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에로스(Eros)는 인간과 결혼했다.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가 자신보다 더 아름답다고 시샘한 어떤 왕과 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프시케(Psyche)가 그 여인이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아프로디테는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을 몹시도 훼방하며 며느리가 될 프시케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올림포스 산의 주신 제우스(Zeus)의 중재로 둘은 겨우 결혼에 이를 수가 있었다. 이 때 제우스가 프시케에게 내민 것이 불로불사의 음료 암브로시아(Ambrosia) 한 잔이다. “프시케야 이걸 마시고 불로불사의 신이 되어라. 그렇게 되면 이 결혼은 영원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둘은 결혼에 성공하게 되고 딸 하나를 낳았다. 그 이름이 ‘쾌락’이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런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불로불사의 음료를 운운한 것은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인간의 꿈이 투영돼서라 말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또 다른 불로불사의 음료는 신들이 마신다는 넥타르(Nectar)다. 하지만 어디에 그런 물건이 있을 것인가. 그저 신화이고 전설이며 꾸민 얘기일 뿐이다. 불사약을 찾던 진시황은 욕심과는 달리 겨우 50년을 살았을 뿐이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후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 사후 세계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서야 있는지 없는지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알게 되는 미지의 세계다. 그러니까 공포의 대상이다. 저 세상이 낙토(樂土)나 정토(淨土), 꿈같은 천당인 것이 분명하다면, 그런 증거들이 분명히 있다면 죽음이 덜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그런 지식을 주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진 않았다. 이 세상 살기가 힘들고 고단하고 망신스럽고 창피하다해서 얼른 이 세상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와버릴까 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쉬이 던져버릴 수 있다면 국가나 사회공동체는 애초에 구성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누가 법의 강제력이나 국가 사회가 부과하는 의무를, 만약 그것이 지극히 혹독할 때가 있다면 견디어내려 할 것인가. 누가 당장의 큰 고통을 겪으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차후 희망을 일구려하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임전무퇴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욕을 북돋는 것은 사람이 갖는 희망이므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뭔가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국가경영 사회경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이 악착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자살률이 높은 나라다. 사람들이 절망하기 쉬운 사회구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닌 가 심각하게 진단해볼 때다. 진시황 같은 허황한 욕심은 아닐지라도 장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희망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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