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중국의 국내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동년 5월에 남경으로 환도한 국민정부는 11월에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제정에 착수했다. 이듬해 1월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형(民亨)의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7년 4월의 국민대회에서 장개석(蔣介石)을 총통, 이종인(李宗仁)을 부총통으로 선출했지만, 항일전쟁에서 공동전선을 펼쳤던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장개석은 종전과 동시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의 주력 팔로군을 소탕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팔로군이 점령한 ‘해방구’의 무력이 생각보다 강했고, 대다수 중국인들이 내전보다는 평화와 민주를 갈망했기 때문에 당장 전면전을 펼치지 못했다. 해방구의 군사조직이 완성되면 숙적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내전을 유발하기 위해 ‘강화담판’을 활용했다. 1945년 8월 14일에서 23일까지 그는 모택동(毛澤東)에게 3차례 전보를 보내 중경에서 만나 국가의 대계를 상의하자고 제안했다. 속셈을 간파한 모택동은 공산당원들에게 명확한 어조로 선언했다.

“장개석의 방침이 진작 전해졌다. 내전의 위험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장개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빼앗겠다는 속셈이다. 우리는? 한 치의 땅이라도 지켜내야 한다!”

모택동은 교묘한 전략가였다. 장개석의 평화담판을 거부한다면 중국인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모택동은 결국 중경에서의 평화담판이라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택동이 쉽게 격장지계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장은 모가 제안을 거절하면 책임을 공산당에게 돌리고 곧바로 내전에 돌입하려고 했다. 모가 능동적이고 장이 피동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8월 28일, 연안(延安)에서 비행기로 중경에 도착한 모는 다음날 바로 담판하자고 요구했다. 국민당 대표는 회담을 환영하면서 내전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과거 10년 동안 항일전쟁에서 공산당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이 국민당 군대를 기습해 내전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공산당과 관련된 군대를 모두 ‘초비(剿匪)’로 규정했다. 이후의 진압작전에서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이었다. 공산당 대표는 국민당의 연막전술에 숨은 음모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9월 2일과 4일, 모와 장의 직접담판이 벌어졌다.
장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핵심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모는 집요하게 국내문제 해결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천명했다. 주은래(周恩來)도 왕세걸(王世杰), 장군(張群), 장치중(張治中), 태력자(邰力子) 등 국민당 대표와 평화적 해결에 대한 구체적 절차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애초부터 협상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장개석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연일 파티를 열어 담판을 지연시키면서 결과가 무산되기만을 기다렸다.

장개석도 만만치 않았다. 여전히 평화공세를 펼치며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던 그는 몰래 장가구(張家口), 상당(上黨), 한단(邯鄲) 등 공산당 해방구를 공격했다. 회담을 유리하게 끌려는 시도였지만, 3곳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 장개석의 위장평화공세도 폭로됐다. 장개석은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43일간의 회담에서 ‘쌍방협정’이 체결됐다. 모택동은 연안으로 돌아가고, 주은래가 이끈 공산당은 1946년 1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장개석의 입장에서 쌍방협정이나 정전협정은 다급한 나머지 불가피하게 취했던 ‘완병지계(緩兵之計)’에 불과했다. 그는 협정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곧바로 육·해·공군을 동원해 동북과 화북의 공산당 본거지를 공격했다. 194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는 전국적인 규모의 공산당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미 중국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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