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우리나라의 조리용어 중에 ‘채 친다’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 ‘채(菜)’는 나물요리를 말하고, 무나 오이 등 식재료를 나물을 만들기 위해 가늘고 길게 써는 것을 두고 채를 친다고 쓴다.

채는 식재료의 가열 여부에 따라 생채(生菜)와 냉채(冷菜), 숙채(熟菜)로 구별한다. ‘생채’는 날것 그대로 채를 쳐서 양념한 것이며, ‘냉채’는 전복, 해삼, 닭고기 따위에 오이, 동아, 배추 따위의 채소를 잘게 썰어 섞고 얼음을 넣어 차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숙채’는 채 친 것을 삶아 양념한 것을 말한다.

한편 재료의 종류에 따라 소채(蔬菜), 어채(魚菜), 잡채(雜菜)로 나뉜다. 이중 ‘잡채’는 숙채의 일종으로 여러 가지의 나물이 섞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잡채는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어 먹는 별미이지만, 당시엔 궁중에서 먹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잡채는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을까.

‘광해군일기(1908~1923)’에는 잡채를 만들어 호조판서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인 이충을 빗댄 작자 미상의 시가 등장한다. '沙蔘閣老權初重(처음에는 사삼각로의 권세가 중하더니) 雜菜尙書勢莫當(지금은 잡채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

여기서 ‘사삼각로’는 한효순(광해군 당시 이이첨과 함께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시킨 장본인)을 일컫는 것이고, ‘잡채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더덕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바친 한효순의 권력이 막강했는데, 지금은 임금에게 잡채를 만들어 바친 호조판서 이충의 권력을 당해낼 자가 없다’며 음식으로 권력을 취한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다.

당시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왕에게 바치곤 했는데 ‘광해군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충은 갖가지 채소를 볶아 새로운 맛을 가미한 음식을 올렸는데, 그 맛이 아주 좋아 임금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그 요리가 바로 잡채였던 것이다.

한편 ‘잡채상서(雜菜尙書)’ ‘침채정승(沈菜政丞)’이라는 말도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利)를 즐기고 염치가 없는 벼슬아치들이 내시들에게 붙어 못 할 짓 없이 하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잡채(雜菜)나 침채(沈菜, 김치)를 임금께 바치고 왕의 총애를 받는 관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잡채 조리법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1670년경에 발간된 ‘음식디미방’이다. 이 책에 나오는 잡채의 재료와 조리법을 보면 ‘오이채,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 숙주나물은 생으로 하고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와 꿩고기는 삶아 실실이 찢어 놓는다. 갖가지 재료를 가늘게 한 치씩 썰어 각각 기름간장에 볶아 둔다. 큰 대접에 재료들을 담아 알맞게 즙을 뿌리고 천초, 후추, 생강을 뿌린다. 즙은 꿩고기 다진 것에 된장을 거른 즙과 참기름, 밀가루를 섞어 간을 맞추고 밀가루 국에 타서 한소끔 끓여 걸쭉하게 만든다. 빛깔을 내려거든 도라지와 맨드라미로 붉은 물을 들이고, 없거든 머루 물을 쓴다. 갖가지 재료들은 구할 수 있는 대로 하면 된다’라고 쓰여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