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너도 나도 통일운동에 뛰어드는 일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무슨 ‘상품’ 쯤으로 생각하는 ‘잡상인’들까지 끼어드는 일은 서글프다. 통일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민족사다. 너도 나도 함께할 수는 있지만 간혹 통일을 핑계 삼아 생계를 해결하려 든다면 이는 차라리 물러나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독립운동 당시 너도 나도 독립을 외쳤지만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독립을 얻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남녀노소 한결 같이 통일을 말하지만 진정 나의 희생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여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는 독립운동에서 3인의 위인을 통해 통일운동의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열여섯 살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했고,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산이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해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됐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돼 도산이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 건물의 회관도 가졌으며,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해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매우 힘 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라났다.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후 우익의 최고지도자다.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을 논할 때 결국 핵심부분은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꾀했고, 김구는 통일된 조국이 안 된다면 소용없다는 식으로 버텼다. 심지어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까지 찾아가면서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은 이승만은 민족분단을 획책한 ‘나쁜 놈’, 김구는 통일국가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과연 이게 옳을까? 보편성의 원칙에서 보면 이는 옳지 않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평가가 만약 지식인 중에서도 이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몰랐고 공산주의자가 왜 말이 안 통하는 집단인지를 몰랐던 당시에 있었다면 시대상을 반영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이념실현을 위해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걸 6.25로 겪고 자유민주주의가 왜 공산국가보다 위대한지를 이미 알고 있는 현재까지 와서 오히려 시대역행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김구의 이런 면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용공세력으로까지 음해하지만 우리는 시대상을 반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용공세력으로 보는 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남과 북을 모두 바라보며 과연 어느 쪽이 통일국가의 모델이 돼야 하는지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왜 우리 한국사회는 통일에 소극적인가. 무엇 때문에 진정한 통일론자들은 모두 숨을 죽인 가운데 ‘통일잡상인’들만 설치고 있단 말인가?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심사숙고해온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면면을 보면 모두 훌륭한 분들이지만 과연 그 분들 중에 자기의 기득권보다 통일을 우선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다. 자기희생과 각고의 노력을 각오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그 성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오고 진정한 통일일군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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