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부처님인들 사람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해가지는 못한다. 어느 날 부처의 몸에 병이 생겼다. 그때 부처의 병을 치료한 의사가 당시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리던 기파(耆婆)다. 기파는 별명이며 그의 본명은 ‘지바카 코마라바카(Jivaka-komarabhcca)’다. 그의 아버지는 고대 인도 마가다 왕국의 빔 비사라 왕이다. 아버지의 신분은 이렇게 고귀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사연과 인연 때문인지 몸 파는 여인이었다. 그는 부처와 부처 제자들의 주치의로서 활동함과 동시에 인도 전역을 돌며 인술(仁術)을 베풀었다.

그가 인술을 베풀며 평생을 보낸 것은 부처의 설법과 당부가 주효해서인 듯하다. 기파의 치료를 받고 난 뒤 부처는 기파에게 말한다. “사람의 가장 큰 병은 육체의 병보다 마음의 병인 번뇌다. 번뇌는 만병의 근원이며 따라서 의사는 이 병의 근원을 치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의사는 자비심으로 환자를 돌봐야 하며 이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같은 설법과 당부를 듣고 나온 기파는 “부처야말로 명의 중의 명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파가 부처의 말뜻을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그 기파야말로 진정한 명의였음에 틀림없다.

전설적인 명의로는 중국에 편작(扁鵲)과 화타(華陀)도 있고 이 땅에는 조선 명종 선조 광해군 때 크게 활약한 허준(許浚)도 있다. 편작은 고대 중국 곽나라의 태자를 죽음에서 되살려냈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편작은 그 같은 신묘한 의술과 명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지만 그를 시기한 진나라 전의 이혜(李醯)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화타는 삼국지의 인물인 관우(關羽) 장군을 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조조(曹操)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싸움에서 독화살을 맞아 그 독이 뼛속까지 스며든 관우 장군이 진중으로 화타를 불렀다. 화타는 오늘날과 같은 마취 없이 관우 장군의 생살을 찢어 썩은 피와 고름, 썩은 살을 도려내고 독이 벤 뼈를 긁어내야 했다. 그처럼 고통을 참아내기 어려운 큰 수술이기에 화타는 시술에 들어가기 전 관우 장군에게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아야 하며 힘이 센 장정 몇이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우 장군은 “괜찮으니 걱정 말고 시술이나 어서 하라”며 말하고 시술이 끝날 때가지 태연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조가 어느 날 화타를 불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식은땀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의 어떤 명의도 조조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조조의 병에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다. 그는 새로 건축할 궁전의 대들보로 쓰려고 몇 천년된 배나무를 베려 했다. 그의 부하 장수들이 배나무가 신령한 것이어서 베어지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했을 때 그는 화가 나 “천하를 휘어잡은 조조 앞에서 무슨 소리냐”며 보검을 빼어 나무를 내리쳤다. 그런데 나무가 베어지기는커녕 나무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에 놀라 그는 궁궐로 허둥지둥 돌아오고 말았다. 믿거나 말거나 그날 밤 꿈에 배나무 귀신이 나타나 조조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앗’ 하고 놀라 깬 뒤부터 그의 병은 시작됐다.

조조를 진찰한 화타가 그 같은 배경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대왕의 두통은 온 몸을 마취시키고 도끼로 머리를 쪼개어 병의 원인을 꺼내야 합니다. 독화살을 맞은 관우 장군의 그것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조조는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의심해 화타를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해 죽인다.

이 땅의 허준은 어떤가. 그에게는 기파 편작 화타의 경우처럼 전설적으로 과대 포장된 것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기실 저들보다 모자랄 것이 뭐 있겠는가. 허준은 명종 때 태어나 29세였던 선조 7년에 어의로 데뷔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주로 피난한 선조를 따라 그를 내내 돌보았다. 광해군 때는 그 유명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냈다. 그런 그에게 전설 속의 명의들의 경우에서처럼 시기와 모함도 많았다. 명의는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나중에 전설로 남겨질 만한 명의들이 알게 모르게 활약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라.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고 따뜻해지며 밝아져 옴을 느낄 것이다.사람 육신의 병은 의사가 고친다. 사회도 사람의 육신과 같은 유기체다. 그렇다면 각종 사회적 고질과 질환을 고칠 ‘명의’는 어디 없는가. 육신의 병으로 말할 때 기파 편작 화타 허준과 같은 명의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할 그런 지도자들이 그렇게도 없는가. 벌써 몇 명째인가. 밤하늘의 운석처럼 반짝 섬광을 발하다가 이내 곤두박질을 쳐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을 우리는 여럿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질환의 현상과 증상, 증후(Syndrome)다.

개인이 건강하지 않으면 사회가 건강할 수 없다. 고위직 후보자들의 허다한 낙마가 웅변하는 것은 때 묻지 않은 건강한 인적 자원의 빈곤이다. 동시에 그 건강한 인적 자원의 빈곤이 사회적 질환을 중환으로 심화시킨다. 그 뿐인가. 그렇게 심화되는 사회적 질환이 또 개인의 건강성을 해치는 악순환 구조를 보인다. 그 고리를 반드시 끊어야 한다. 누가? 각계 지도자들이,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각성해야 한다. 편가름이나 정쟁에 매몰되면 개인과 사회에 그 폐해가 미친다. 사회에 흐르는 맑은 물 흐린 물 가릴 것 없이 그 근원은 정치다.
결국 사람과 인물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다. 국가 혁신이나 사회 혁신도 출발은 사람으로부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딜레마(Dilemma)다. 하지만 사람은 실수한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 검증이나 국회 청문회가 그들에 대한 ‘제척(除斥)’의 꼬투리만을 찾아내려 할 것이 아니라 ‘참회(懺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가. 답답해서 하는 소리지만 중대한 결격 사유가 아닌 한 진솔한 ‘참회’로서 새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회의 병을 다스리는 명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긴 어딘가에 우리가 찾는 진정한 명의가 없지도 않을 텐데 어떻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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