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최시형-손병희-박인호 4대에 걸쳐 체제 잡혀

▲ 왼쪽부터 천도교의 발전을 이룬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교조. ⓒ천지일보(뉴스천지)

 

창설 배경

19세기 중엽 양반 지배층의 부패와 세도정치로 인해 나라 각처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고 심각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수운(水雲) 최제우는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했다. 최제우는 ‘사람이 한울님(天主)의 뜻 즉, 천명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처럼 세상이 어지럽게 됐다’고 진단해 사람들이 한울님의 뜻을 알고 따르면 어지러운 세상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마침내 1860년 4월 5일 그는 경주 용담정에서 일심으로 수도를 한 끝에, 만고(萬古)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란 새로운 도(道)를 얻게 되는데 이를 ‘도는 천도(天道)이나,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받으니 학은 동학(東學)’이라 칭했다. 이는 당시 동양(東洋)을 위협하던 서학(西學)의 대립적 의미도 내포돼 있었다.

이후 최제우는 성(成)·경(敬)·신(信)을 도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要訣)로 삼고 포교를 시작해 농민·천민·유생에 이르기까지 포덕(전도를 의미)을 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한울님은 멀리 있지 아니하고 내가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알고, 한울님의 조화로 모든 생물이 살고 있다는 천덕(天德)을 깨달아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셨으니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사람을 한울님 같이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게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 수운 최제우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용담정. 경주시 현곡면에 위치해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최제우-최시형-손병희-박인호 4대에 걸쳐 약진

최제우는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고, 1863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道統)을 계승하게 한다. 각 접소를 순회하다 용담정에 돌아온 최제우는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864년 3월 대구장대에서 참수되고 만다.

뒤를 이은 2대 교조 최시형은 관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등에서 숨어 지내면서 흩어진 동학의 교도들을 다시 모아서 정비한 후 교세를 넓혀 간다. 최시형은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이란 깃발아래 최초의 민주화 운동인 ‘동학농민혁명운동’을 펼친다.

이는 벼슬(官) 위주의 정치에서 백성(民) 위주의 정치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최시형은 집강소를 운영해 이 땅 위에 민주주의를 심고자 힘을 기울였다. 부패한 관직들과 침략을 앞세우는 일본과의 항쟁을 하다가 그도 결국 1898년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패해 체포된 후 형장에서 순도하게 된다.

최시형의 뒤를 이어 의암(義菴) 손병희가 천도교의 3대 교조로 활약한다.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의 정식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됐다. 손병희는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보성사란 출판사를 창립하고 보성·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해 교육과 문화 사업에도 힘썼다.

1908년에는 교조 자리를 춘암(春菴)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 봉황각에 은거하며 수도에 힘쓰는 동시에 독립 운동에 앞장설 인재들을 훈련시킨다. 3.1운동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해 왔던 손병희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는 옥고 중 병을 얻게 돼 병보석으로 출감해 치료를 받았지만 1922년 3.1운동을 벌인 지 3년 만에 서거하고 만다.

이어 손병희 뜻을 받들어 대신 천도교의 4대 대도주가 된 춘암 박인호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 확장에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박인호는 손병희가 힘썼던 출판문화와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해 사회 성인교육의 일환으로 전국에 800여 개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여 민족 교육에 앞장선다.

그는 3.1 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의 중책을 수행하기 위해 민족 대표에서는 빠졌지만, 48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손병희의 서거 후에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일제와 맞서 싸우며 천도교를 이끌다가 1940년 향년 86세에 서거한다.

▲ 의암 손병희가 머물며 3.1운동의 발원지가 됐던 봉황각.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해 있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계몽운동 등에 앞장서

천도교는 일제 당시만 해도 기독교보다 훨씬 많은, 천만 이상의 교인수를 자랑했지만 일제의 심한 탄압에 의해 현재는 교세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일제 당시에는 ‘갑진개화운동(1904)’ ‘을사(1905) 의병운동’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1919)’ ‘6.10 만세운동(1926)’ ‘신간회 운동(1927)’ 등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3.1운동의 계기가 된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발표에는 대표 손병희를 비롯해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15명의 천도교인이 참여했고, 만주에서는 대종교와 함께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밖에도 일제의 패망을 기원한 ‘무인멸왜 기도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개벽’ ‘혜성’ ‘새벗’ ‘어린이’ ‘조선농민’ ‘신여성’ 등 출판문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어린이날 창시자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도 천도교인으로서 민족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인내천’ 종지와 종교적 목적

천도교의 종지가 되는 ‘인내천’은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한다. 곧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뜻이다. 이는 의암 손병희 시대에 정해진 종지이지만, 수운대신사 최제우가 천명(闡明)한 ‘시천주(侍天主)’에 그 근원을 둔 것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핵심이다.

최제우는 포덕 1년(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신이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사람들 몸에 주체적으로 모셔져 있음을 깨닫는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시천주(侍天主)’를 가르침의 요체로 삼고 있다.

이 ‘시천주’ 사상은 해월신사 최시형에 와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시천(人是天)’으로 표명됨으로써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회적 윤리로 발전된다. 따라서 현재 천도교는 인내천의 종지와 함께 사인여천을 사회적 실천윤리로 삼고 있기도 하다.

또한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차원의 시대를 맞아, 인류의 가장 큰 숙원인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는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가 지향하는 후천개벽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인 ‘지상천국의 건설’이기도 하다.

◆수행과 신앙방법

천도교의 종교적 행위는 ‘수행과 신앙’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에 치중하지 않고 모두 겸하고 있다. 손병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을 이어 천도교인들이 행해야 할 ‘수행과 신앙’의 방법을 ‘오관(五款)’으로 제정했다. 오관은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祈禱)’의 5가지가 천도교인이 행해야 할 종교적 의식(儀式)과 수행의 방법이다.

천도교의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문’은 바르게 앉아서 눈을 감고 반복적으로 주문을 읽으며 수련에 임하는 것이다. ‘청수’는 매일 오후 9시에 한울님을 모시는 ‘기도식’이라 하며, ‘기도’란 일정한 날과 기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특별기도를  말한다. ‘시일’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奉行)하는 종교적인 집회이고 마지막으로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 한 식구당 한 숟가락씩 정성으로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헌납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이 같은 5가지 천도교의 종교적인 행위 ‘오관’에는 ‘수행과 신앙’의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이와 같이 천도교의 수행과 신앙은 주문과 기도를 통해 생활 속에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하고, 나아가 수심정기(守心正氣)를 통해 잃어버린 본성을 다시 회복하고, 우주적 섭리에 합일할 수 있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데 있다.

◆춘암상사 박인호 이후 3년마다 교령 선출 체제로 전환

▲ 김동환 교령.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는 춘암상사 박인호 이후 중의제(衆議制)에 의해 교령(敎領)을 선출하는 체제로 전환해 3년마다 교령을 선출해 왔고, 교령이 바로 교단의 행정적·정신적 지도자로 천도교를 대표한다.

현 김동환 교령은 천도교를 한국 근현대사의 운명과 함께해 온 종교라고 표현하며 그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이 물질과 구습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 주체의 신문명 시대, 인간 해방, 인간성 회복을 추구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또한 개벽사상을 바탕으로 구식 문화문명의 청산을 통한 새 시대 창조와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 정립을 이끌어 간 새 역사의 실천적 주역이었습니다. 마지막 보국안민 사상을 바탕으로 희생을 바치면서도 투철한 민족 주체적 구국독립 운동을 주도했으며, 동시에 서구 문물을 진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개화·혁신 정신을 선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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