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열사 김마리아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천지일보=이길상 객원기자]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것입니까? 수레바퀴는 한쪽으로만 달리지 못합니다.”

한평생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김마리아’가 1919년 1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열린 신년웅변대회에서 열변을 토한 내용이다.

새누리당 황인자 의원(비례대표)은 최근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순국열사 김마리아 서거 7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학술발표회는 김마리아의 생애와 사상을 되새기고 한국 독립운동에서 그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열렸다.

황인자 의원은 학술발표회 개회사에서 “‘김마리아’란 이름은 우리 민족 수난사상 민족혼으로 핀 한 떨기 무궁화 꽃”이라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친 ‘항일여성운동계의 대모’”라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평소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됐을 것이다’라고 극찬했고, 당시의 선교사들은 ‘김마리아야말로 한국의 잔 다르크, 이 세대의 한국 여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한 바 있다”고 전했다.

덧붙여 “언제부터인가 김마리아는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니 이는 우리 후손들이 스스로 애써 찾지도 않고 세상에 널리 알리지도 못한 책임이 크다 할 것”이라며 “그 책임 중에 하나가 바로 2.8독립선언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이고, 그의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며, 김마리아가 배우고 가르쳤던 연지동의 정신 옛 교정을 김마리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일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용옥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김마리아의 항일독립운동과 역사상 위상’이라는 주제의 기조발제에서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는 철두철미한 독립정신으로 무장한 항일독립운동가이며 민력(民力) 양성으로만 자주독립이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여성교육운동을 추진한 민족지도자로서 50여 한평생을 오로지 조국에 바친 위대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김마리아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의 위상은 민족 간, 국가 간 평등과 남녀평등의 이념을 토대로 한 실력 양성을 독립운동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고 직접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론과 행동을 겸비한 가장 주목되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이라고 전했다.

김마리아는 1882년 6월 18일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 사이에 딸만 셋인 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단에 섰다.

김마리아는 2.8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3.1운동 때 시위운동 중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위독해 5개월 만인 8월에 석방됐다.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고문으로 인한 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또한 그는 1920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1942년부터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한 김마리아는 일제의 고문을 받아 얻은 병이 재발, 1944년 3월 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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