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철 한국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한(恨)과 흥(興)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문화적 기질이다. 한은 정서적으로 슬픔의 정서로 가라앉는 하향적 기질이고, 흥은 기쁨의 정서로 반대로 일어나는 상향적 기질의 정서다. 서로 같이 할 수 있는 기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한과 흥의 정서가 한민족의 속에는 같이 들어 있다. 슬픔과 기쁨이 한 사람 마음 안에 같이 들어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민족성에서 이처럼 다른 것을 확연하게 가진 경우는 없으리라 본다.

한의 정서는 한국인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다. 한은 강자에 의한 억눌림을 표출하지 못하는 억눌림에서 오는 감정으로 응어리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어라고 노동을 하고도 굶어야 하는 굶어야 하는 가난에 대한 원망, 왕조국가에서 백성으로서 눌리며 왕족과 양반들의 기세에 억눌려 살아가야 하는 약자로서의 원망이 한이란 정서 속에 녹아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힘든 인생역정에 대한 원망이 한의 정서에 담겨있다. 한은 극히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다.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에게는 원망의 정서는 있어도 한과 부합하는 정서는 없다. 한의 정서에는 특별한 점이 있는데 복수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혼자서 감내하고 참는데서 한의 정서는 출발한다. 은장도를 보면 공격용이 아니라 철저하게 방어용이다. 하지만 방어용으로서는 어이없게도 자결용이라는 점이 보여주는 바가 크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극히 수동적인 무기이다. 이러한 무기는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의 정서를 대변하는 무기이다.

한국의 한의 정서와 다른 민족의 원의 정서의 차이는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는 방법에 있다. 원은 가해자에게 같거나 비슷한 복수를 함으로써 풀어지는 데 반해 한은 어떤 이유로 복수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특성이다. 다른 방법으로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푼다. 한의 정서에서 피해자가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적·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수를 하지 않는 것에는 한국문화에 잔인한 복수의 정서가 약하기 때문이다.

한의 정서는 억눌림을 참는 특성으로 인해 생긴 병이 있다. 한국인에게만 생기는 병으로 영어 표기로도 hwa-byung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화병(火病)은 다른 말로 울화병(鬱火病)이라고도 한다. 모두 불과 관계가 있다. 가슴에 타는 것 같은 증세를 표현하기 위한 병명이다. ‘속에서 불이난다’는 말을 자라면서 종종 듣고 자랐다. 지금도 노인분들이 하는 말이다.

화병은 화를 참는 일이 반복되어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 질환이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 1996년 화병을 문화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는데, 더욱 한국인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문화 의존 증후군으로 한국인 특유의 정신 질환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 특성에서 한국인만이 걸리는 특별한 병이라는 것이다.

화병이란 누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 억제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신경성적 불, 우리말로 이를 울화(鬱火)라고 한다. 울화로 인해 드러나는 일체의 증상을 의미하다. 화병에는 억눌림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감정이 개입되어 있다. 노여움, 기쁨, 생각, 근심, 슬픔, 두려움, 놀람 등의 정서가 화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병의 증상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가슴의 답답함, 전신의 열감, 목이나 명치에 뭉쳐진 덩어리의 느낌, 치밀어 오름,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자주 느낌, 깊이 눌려 있는 분노의 감정이라는 사전적인 정의가 명시되어있다.

우울증과는 다르다. 우울증은 정신증상 위주로 우울함을 호소하는 반면, 화병은 신체증상을 위주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점이 다르다. 한은 한국인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이며 한으로 인해 발병하는 화병도 한국인에게서만 발생하는 문화관련 증상이라는 결론이다. 한의 정서는 극히 한국적인 오랜 정서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경우는 억눌림에 대한 감정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오는데 반해 한국인에게는 몸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복수를 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흔히 우울증이나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지만 한국인은 혼자서 끙끙 누워서 앓거나 몸으로 아픈 증세를 보인다. 결리고, 담이 오고, 체기를 느끼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낀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증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인내심이 강한 민족이다. 참을 줄 아는 만큼 해내는 기질도 대단하다. 밤을 새면서 일을 하고, 휴일을 잊고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민족이다. 죽어라고 땀 흘리는 한국인이 못 살면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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