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문제 첫 시민강좌 연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호사카 유지 교수

▲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호사카 유지 교수.
“일본 침략은 독도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독도를 지키는 것이 한반도 전체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일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독도의 날’을 기념해 26일 세종대학교에서 가진 첫 시민강좌에서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 교수는 독도의 가치에 대해 이같이 밝히며 “국민들이 이제는 정확한 지식을 갖고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독도 문제는 풀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사카 교수는 또 “독도는 일본의 오키나와와 같은 섬이라고 일본사람에게 설명해 주면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오키나와 섬에는 주일미군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다. 지난 1995년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이는 그 당시 일본 사람 전체가 나서서 항의했기 때문이다.

이날 호사카 교수는 ‘고종이 인식한 독도’라는 주제로 1880년대에 독도의 이름이 우산도에서 석도, 독도로 바뀌는 과정과 ‘대한제국 칙령 41호’ 1904년~1907년에 걸친 일본의 독도 침탈 과정 등의 내용을 설명했다.

조선왕조는 17세기 말 일본과 울릉도분쟁을 일단락한 후에 18세기에는 3년에 한 번씩 울릉도, 독도 등지에 사람을 파견했다. 하지만 19세기(1800년대)가 되자 파견이 중단됐다. 그로 인해 울릉도에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몰래 들어가기 시작하자 고종은 종래의 울릉도에 대한 공도(空島) 정책을 포기해 울릉도에 사람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울릉도 감찰사를 현지로 파견하기도 했다.

호사카 교수는 “고종이 파견한 울릉도 감찰사로 이규원을 임명해 울릉도와 우산도(이 당시에는 독도로 알고 있었음) 등을 조사해 올 것을 명했다”며 “이규원이 우산도란 울릉도의 옛 이름이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대화가 계기가 돼 독도의 명칭이 ‘우산도’에서 ‘석도’ ‘독도’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우산도는 울릉도다. 우산(芋山)이란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國都) 이름이다. 우산국은 512년 신라에 합병됐는데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나라이다. ‘동국문헌비고’와 ‘만기요람’ 문헌에는 ‘울릉, 우산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독도)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호사카 교수는 특히 “대한제국 당시 1900년 칙령 41호에 ‘독도’를 ‘석도’라는 명칭으로 울도군 관할 하에 두었고, 그 사실을 관보로 세계에 알렸다”고 전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무명, 무국적(무주지)의 무인도로 규정, 울릉도의 이름이었던 다케시마를 독도의 이름으로 해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일본 내무성은 이를 반대했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제3조에서 ‘한국의 독립 및 영토를 보전한다’고 약속한 조항을 의식해 비밀리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등 ‘관보’에 실어야 할 영토 편입 사실을 ‘현보’에만 실었다.

호사카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한국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해 지령 제3호로 조사를 명령했다”면서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밀서로 독도를 포함한 한국영토 전체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기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직접 일본에 항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종은 밀서를 통해 일본의 한국영토 침탈 사실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며 “국제회의를 통해 일본에 항의하려는 의도를 고종은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호사카 교수는 1998년 고려대에서 일제시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독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독도에 대해 연구를 하면 할수록 명확한 역사적 자료를 통해 한국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 2003년에는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현재는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으로 독도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그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상임이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자문위원, 동아시아일본학회 일본학분과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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