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7일 오후 3, 인천 삼산월드체육관. 최근 지구촌이 축구의 월드컵 열기로 뜨거운 가운데 이곳은 또 다른 월드컵인 휠체어농구 경기에 매료된 관중들로 인해 모처럼 열기가 뜨거웠다. 그나마 한국 출전 경기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이 유난히 건강한 혈색의 영국 신사한 사람이 휠체어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필립 크레이븐(64) 국제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위원장.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겸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장애인스포츠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관중들이 ~한민국을 외치며 열띤 응원전을 펼치는 가운데 그는 인천세계휠체어농구선수권대회 김장실 조직위원장과 나란히 앉아 한국-아르헨티나 전을 관람했다. 때로는 박수를 치고, 때로는 환호하며 코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유난히 빛났다. 선수들이 활약하는 멋진 모습을 한 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여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원래 휠체어농수 선수 출신으로 농구의 묘미를 너무나도 잘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휠체어농구는 장애인스포츠라는 한계를 넘어 관중에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 훌륭하고 위대한(great) 스포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레이븐 경은 16세 때 암벽 등반을 즐기다 그만 10m 아래 절벽으로 떨어져 척추를 다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처음엔 재활을 위해 시작한 것이 이듬해부터 휠체어농구 마니아가 되는 계기가 됐다. 연습을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휠체어농구에 매료된 그는 영국대표팀에까지 선발돼 1973년 세계휠체어농구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숱한 경기 기록과 드라마 같은 승부의 주인공이 됐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석탄공사의 행정책임자를 지내기도 했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장애인체육행정에 투신한 데 따른 것. 영국 휠체어농구 협회 의장과 국제휠체어농구연맹 의장을 역임했고, 현재 IOC 일을 맡고 있기도 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훈장·명예박사학위 수여, 명예의 전당 헌액은 물론이고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영예의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한 이력이다.

마음을 비운 듯한 여유로운 표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스포츠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필자가 놀라는 것 중 하나는 경기장 주변에서 만난 선수들 대부분이 밝고 쾌활하며 활달한 성품이었다는 것이다. 크레이븐 경도 하고 명랑한 성품으로 느껴졌다. 경기장 밖 관중 가운데 한 명이면서도 그는 경기에 나선 선수 못지않게 열정적이었다.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장애인편의시설이 잘 갖춰져야 하는 등 세심한 준비와 배려가 필요해 장애인스포츠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간 최고 선진국만이 치러온 대회를 한국이 과거 그 어느 대회 못지않게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는 데 감명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세계휠체어농구선수권대회란 어떤 대회인가. 91개 가입국 중 대륙별 예선을 통과한 16개국이 4년에 한 번씩 최강을 가리는 명실상부한 휠체어농구의 월드컵이다. 그런데 그다지 언론의 주목도, 국민의 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5일 열린 개막식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찾지 않았다. 휠체어농구선수들의 감동적인 휴먼스토리를 다뤄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KBS TV ‘인간극장이나 아침마당제작진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경기장 입장은 무료. 그런데도 관중석은 한국 경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텅 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면서 정작 외국 손님들을 모셔 놓고 박수 쳐주는 팬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넉넉지 않은 예산으로 현재 한국 장애인스포츠발전의 한 획을 긋는 국제대회를 큰 대가 없이 치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직위 관계자들은 마치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혹시라도 대회 진행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만에 하나 안전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개최국 체면도 있는데 한국이 선전해줘야 할 텐데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여기서 크레이븐 경의 말씀을 빌어보자. 그것은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스포츠의 하나로 휠체어농구를 즐겨주면 되고, 휠체어농구선수들을 일반인과 달리 바라보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기가 재미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세계 최고 기량을 뽐내고 있다. 선수들을 신이 나게 하는 관심과 응원이 필요할 뿐이다. 뜨거운 함성으로 경기장을 가득 메워줄 팬들의 발걸음이 바로 그 부족한 ‘2%’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각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뛰며 성공스토리를 쓰고 있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면 좋겠다. 이것이 지구촌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며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높아진 국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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